- 2
자글자글한 주름진 얼굴로 손님 없는 낡고 초라한 대폿집 홀에 앉아 문밖을 바라보던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힘든 걸음으로 나와 은숙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 잘 왔다. 내 죽기 전에 네 얼굴 한 번만 보고 가려고 기다렸다. 은숙아, 이 할미가 잘못한 게 많지? 다 용서하고 잊어버려라. 내가 너한테 모진 말을 많이 해서, 네 엄마 만날 면목이 없어. 은숙아, 미안하다, 이 할미가 잘못했다.”
할머니는 은숙 손을 부둥켜 잡은 채 힘겨운 호흡을 이겨내며 말을 맺고, 바로 쓰러져버렸다.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여러 날 의식을 찾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은숙은 엄마를 대신해 자기를 거두어 준 할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눈물로 자책했고, 할머니 흔적을 정성스레 정리하고 가게를 수리 단장해 분식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은숙 남편 석철은 은숙을 찾아냈다
분식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아이들 수다는 어른들 못지않게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은숙은 우연히 미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혹시 미영이 자기가 낳아 버린 아기는 아닐까? 의구심이 들고 있었지만, 자기 아이라 할지라도 부잣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아이에게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석철은 은숙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당신 내가 오늘 무슨 소문 듣고 왔는지 알아? 약방 집 어른 댁에 데려와 키우는 애가 하나 있다는데, 그 애 아비가 이 동네 고등학생을 건드려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당신 여기서 고등학교 다녔다며, 누군지 몰라?”
“나 고등학교 졸업 못 하고 객지로 나가서 몰라요.”
“근데 당신 무슨 사고 쳤길래 고등학교 졸업을 못 했다고 했지?”
“옛날이야기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석철의 의심은 집요했고, 집요한 의심은 결국 은숙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문 때문에 학교를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 애까지 낳았다며?”
“그런 일 없어요. 친구가 퍼트린 소문이에요.”
“그래? 그 친구 누군데?”
“당신 왜 그러는 거예요? 그 친구가 누구면요? 괜한 불란 만들지 말아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당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자 꽤 만난 여자구나 싶었어.”
은숙이 숙식 제공하는 횟집에서 홀서빙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석철은 단골손님이었다. 오갈 때 없는 은숙의 딱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횟집 사장 소개로 만나 교제를 시작했지만, 은숙은 석철의 일방적인 감정표현이 부담스러워 그만 만날 것을 요구했었다.
석철은 아버지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웃집 남자와 도망가 버린 어머니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뱃사람이 되어 일하던 중 은숙을 만나게 되었고, 은숙 노랫소리는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 음색처럼 청승맞았다. 어린 석철은 아버지에게 실컷 매를 맞고 동네 선왕 당에 숨어, 도망간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선왕 당에 걸려 있는 괴물 같은 그림들에게 어머니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자기도 모르게 폭력성을 강화해 갔었다. 석철은 어머니에 대한 삐뚤고 모난 애증을 은숙에게 투영(投影)하고, 은숙 주변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식당이 끝나고 홀을 정리하는 은숙에게 들어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은숙은 석철을 차갑게 거부했다. 석철은 그런 은숙을 무참하게 성폭행했고, 은숙은 그날 딸 정아를 임신하게 되어 석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말았었다.
“당신 잊었어요. 나를 성폭행했잖아요.”
“성폭행? 네가 숫처녀였냐? 사실 너도 좋았잖아. 나 만나기 전에 남자 맛본 지 꽤 됐을 텐데, 나랑 할 때 좋아했잖아?”
석철은 언제나 일방적인 행위로 은숙을 제압해 은숙 몸을 마음대로 다루었다. 은숙은 엄마의 처참한 모습을 보지 않고, 어디로 숨어 버리는 습관이 있는 정아 행동이 다행이라 여겼었다.
석철은 은숙 옛 소문을 찾아 듣고, 약방 집 주변을 살피며 먼발치에서 미영의 모습도 여러 번 관찰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영재 진료실에 찾아가 은숙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영에 관해 묻고 있었다. 영재는 뜬금없이 찾아온 석철에게 은숙 존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석철이 자기 아내에 대한 부정한 소문을 캐고 찾아와, 뭔가 얻어 가려는 비열한 인간 입에서 미영의 이름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우리 아이 엄마는 지금 아이를 키울 수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영재는 석철이 돌아가고 정애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지만, 미영의 친모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들은 것이 없었다. 미영은 친모 동의 없이 입양한 아이였고, 친모가 친권 행사를 하면 별수 없이 미영을 보내야 하는 게 현실임을 알고 있기에, 영재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영재는 석철의 눈을 피해 은숙에게 찾아가 형 덕재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었고, 은숙도 영재도 드러난 진실 앞에 어안이 멍멍해졌다.
“저는 그 아이 모릅니다. 그냥 선생님 댁에서 지금처럼 잘 키워주세요.”
은숙은 단호하고 간곡했다. 하지만, 석철이 알게 되었을 때 미영을 빌미 삼아 뭐든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영재와 숙희는 정애와 마주했다.
“정애야, 생활하는 건 어떠니?”
숙희는 수의 복을 입은 정애 모습을 대면하자, 눈물이 맺혀 참을 수 없었다.
“몸은 갇혀 살지만, 마음은 자유로워요. 작은 사모님, 오실 때마다 눈물 보이시면 제 마음도 안 좋아요. 저 정말 괜찮아요.”
정애는 덕재 아내 교통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사고 원인이 정애라는 증거가 불분명해 무죄로, 덕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오랜 시간 도피 생활을 한 점은 죄질이 나쁜 유죄로 인정되었다. 순득의 죽음은 고의성이 없는 과실치사로 볼 수 있으나, 사고 수습을 늦게 한 것이 도피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정애는 영재가 선임해 준 유명 법률회사 변호사를 사향 하고, 국선 변호사를 선임해 자기 죄를 모두 인정하고 뉘우쳤지만,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 지낼 만해요. 울지 마세요. 미영이는 잘 지내나요?”
“한동안은 밤에 오줌을 싸고 불안해하더니, 학교 다니고부터는 좋아졌어. 영리한 아이라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요즘은 상희라는 친구가 자주 집에 놀러 와서 같이 숙제도 하고 말도 많이 해.”
“다행이에요. 두 분 곁에 두면 잘 커 줄 거라 믿었어요.”
영재는 조심스레 미영의 친모라고 등장한 은숙에 대해 알려 주었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심 중이라 말했다. 정애는 영재 이야기를 듣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영이가 두 분 곁에서 돌봄 받으며 성장하길 바랐는데, 하늘이 정해준 천륜을 어떻게 막겠어요. 두 분께서 아무리 미영이를 보호하려 해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제가 우리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요.”
영재와 숙희는 정애 면회를 다녀오고 마음이 착잡했다. 어른들 방황과 어리석은 비행에서 세상에 존재해 버린 미영에게 드리워지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