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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울고 있는 정아를 미영이 데리고 분식집으로 왔다.
“사거리에서 울고 있었어요.”
“응 고맙구나! 우리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정아가 아직 이 동네를 잘 몰라서, 떡볶이라도 먹고 갈래?”
“아니요, 아빠가 병원에서 기다리세요.”
“아, 네가 약방 집 아이구나.”
은숙은 미영의 모습을 처음 대면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버려진 아기가 저리도 예쁘게 자라난 것이 감사하고 고마웠다. 그때 석철이 들어와 미영에게 말을 걸었다.
“너 약방 집에 데려와 키운다는 아이지?”
“......”
“당신 하고 묘하게 닮았다, 말이지.”
“아빠 기다리신다면서 얼른 가야지.”
은숙은 미영을 석철의 시야에 오래 두고 싶지 않아, 다그쳐 내보냈다.
“당신 이상하네….”
“애들 들이닥칠 시간이라 바빠서 그래요. 가게 일 돕지 않을 거면 들어가세요.”
“돈 좀 줘”
“내가 돈이 어디 있어요.”
“이년이 요 며칠 안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지?”
석철은 가게를 들러 업고 부수며 은숙을 구타하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갈취해 나가 버렸다.
미영은 은숙의 울음 섞긴 비명이 낯설지 않았다. 미영의 머리통을 흔들어 대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제발 죽어버려. 그냥 죽으라고.” 미영은 영재 병원으로 마구 뛰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숙희가 있었다. 미영은 숙희에게 덥석 안겨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숙희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우는 미영의 모습에 당황스러워 미영을 더욱 꼭 안았다. 진정된 미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지만, 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영아, 스님이 미영이 잘 있는지 묻더라. 학교도 잘 다니고 공부도 잘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어. 스님도 잘 지내고 계셔.”
“...... ”
미영이 숙희 품에서 안정을 찾을 때쯤 석철이 들어섰다.
“조금 전에 우리 가게에서 아저씨 봤지?”
석철은 영재 진료실로 밀고 들어가 영재와 숙희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봐도 저 아이 우리 집사람하고 너무 닮아서, 서울 큰 병원 가면 유전자 검사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던데, 우리 집사람 핏줄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어요.”
“이것 보세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여보 미영이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숙희는 급히 미영을 데리고 병원을 나갔고, 영재는 석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 아이 엄마는 부득이한 상황으로 어쩔 수 없는 죄를 지어, 지금 감옥에 수감 중입니다. 한 번만 이런 무례한 언행을 하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나가 주시죠.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아이이에게 어떤 위협적인 언행을 했을 시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명심하세요.”
그날 이후 미영은 자신에게 닥쳐올 고단한 인생을 예측이라도 한 듯,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기운 없이 지냈었다. 상희는 미영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처럼 어두워 보이는 것 같아 미영에게 물었다.
“미영아, 너 요즘 왜 그래? 내가 매일 너한테 숙제해 달라고 해서 힘들어?”
“......”
“도대체 왜 그러는데…?”
“너는 네가 세상에 나올 때 기억나? 아빠 엄마가 누가 될지 알고 있었어?”
“야,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왜 너는 그런 게 궁금해?”
“아니, 나는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알고 싶지 않아.”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미영을 보며 상희도 같이 눈물이 났다.
“미영아 울지 마, 안 궁금한 게 맞아. 네 말이 옳아, 앞으로도 계속 진짜 네가 옳을 거야. 울지 마.”
상희 위로는 미영의 불안함을 희석하지 못했고, 미영은 영재와 숙희 눈치를 보고 있었다.
햇살이 예쁘게 반짝이는 날, 뒷마당 빨랫줄에 이불 빨래를 널고 있는 숙희에게 미영이 다가가 물었다.
“도와드릴게요.”
“엄마에게 무슨 할 말 있어?”
미영이 다가와 말을 거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영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숙희는 어떤 이야기든 해 주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겨우 국민학생 어린 미영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저, 어디로 보내실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
“......”
“지난번 이상한 아저씨 때문에 그래?”
“.......”
“미영아, 우리는 미영이 네가 우리 집에 온 순간부터, 한 번도 너를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고 생각한 적 없단다. 우리가 네 엄마 아빠가 된 것은 우리가 너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의 의미이기도 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미영아, 걱정하지 마.”
“엄마, 그 약속 꼭 지켜주세요.”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빨래에 집게를 꽂아, 기다란 작대기로 빨랫줄을 공중으로 쭉~ 올려 고정했을 때, 시원한 바람이 숙희와 미영의 얼굴을 스치고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희영이 한국에 들어왔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희옥과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희애가 방학으로 내려와 있었다. 고등학생인 석진은 여전히 자주 병원을 오가고 있었고, 중학생이 된 희선은 좋아하는 유명 스타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에 빠져, 가끔 숙희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미영은 초등학교 3학년 끝자락 겨울 방학 동안 모처럼 다 모인 언니들이 북적이는 집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언니들은 여전히 미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석진은 그런 미영을 늘 안쓰러워했다.
그날은 석진이 서울 병원으로 몇 주 전에 검사해 둔 결과를 듣기 위해 가는 날이었다. 석진은 혼자 놀고 있는 미영에게 서울 구경하겠냐 물었고, 미영은 석진을 따라나섰다. 운전기사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도착한 서울 도심은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고, 차들이 뒤엉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미영아, 지루하지? 서울은 늘 이래.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미영은 처음 와 보는 서울 도심, 복잡한 화려함과 북적이는 사람들의 갖가지 소리와 표정이 놀랍고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오빠에게 말 많은 동생이 될까 봐, 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조용히 감탄만 하고 있었다. 거대한 건물 대학병원에 도착했을 때, 함박눈이 펑펑 내려 쌓였고 석진이 진료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기사 아저씨는 미영을 데리고 병원 매점에서 알록달록 예쁜 젤리를 사 주었다. 봉지에서 젤리 하나씩을 꺼내 모양과 색깔을 관찰하고 입에 넣어 아껴 먹고 있을 때, 석진이 나왔다.
“오래 기다렸지?”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석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환하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오빠, 다 나았지?”
“응, 선생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대.”
“정말? 오빠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그래, 오빠 건강해질게.”
석진은 미영을 데리고, 기사 아저씨와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햄버거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에게 몇 시간의 여유를 얻어 주변 백화점과 번화가를 돌며, 미영에게 복잡한 도심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석진은 미영에게 예쁜 목도리와 장갑, 방울이 달린 털모자도 사 주었다. 길 건너에 기사 아저씨와 주차된 차가 보였고, 미영은 건널목에 초록불이 켜지자, 기사 아저씨에게 석진이 사 준 목도리와 장갑, 털모자를 자랑하기 위해 건널목을 뛰어가고 있었다. 그때 젖어 언 도로에 미끄러진 트럭 한 대가 미영을 향해 돌진했고, 석진은 미영에게 달려가 미영을 밀쳐내고 트럭에 치여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영은 다른 차에 부딪혀 병원으로 옮겨져 급한 수술을 해야 했다.
영재는 운전기사 연락을 받고 다급하게 택시를 불러 타고 은숙에게로 갔다. 은숙의 혈액형을 물었고, 그녀를 차에 태우고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은숙은 미영 수술에 필요한 수혈을 시작했다. 미영은 은숙과 같은 희귀성 혈액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