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夢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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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자욱한 안개가 넓게 퍼져있는 고요한 물 위, 멀찍이 커다란 여객선이 어렴풋이 보이고, 사람들은 여객선에 오르기 위해 줄지어 작은 나무 나룻배를 타고 있었다. 미영이 작은 배에 오르자, 배는 여객선이 있는 방향으로 노를 저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험상궂은 할아버지가 미영을 번쩍 들어 올려, 움직이는 배 밖으로 내던지며 호통쳤다.

“네가 탈 배가 아니야. 어서 돌아가”

“나도 가고 싶어요. 저기 큰 배에 타고 싶어요.”

할아버지 무서운 얼굴은 금세 눈물을 머금은 얼굴이 되어, 미영에게 손을 내휘두르며 다시 말했다.

“아가, 아직 올 때가 아니야. 얼른 돌아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미영이 조금씩 의식을 찾고 있었다. 약방 집 대청마루에 걸려 있던 사진 속 할아버지 얼굴이 흐릿해지고 눈을 떴을 때, 미영 옆을 지키고 있던 은숙은 다급하게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담당 의사를 호출했고, 의료진이 와서 미영의 상태를 살폈다.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할머니 우리 미영이 살려 줘서 고마워….”

은숙은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미영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내내, 얼굴도 모르는 엄마에게 또 할머니에게 미영을 살려달라 빌며, 애끊는 심정으로 미영 곁을 지켰었다.

“엄마는요?” 미영은 숙희를 찾고 있었다.

“응…. ” 은숙은 미영의 물음에 그저 할 말이 없었다.


미영은 아주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눈앞에 있는 은숙이 낯설지 않았다. 허물어진 집에서 밀려 나와 지금까지 꿈을 꾸고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자기를 죽어버리라고 부정했던 여자 목소리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여자 얼굴…. 미영은 은숙이 떠먹여 주는 밥도 거부하고 영재와 숙희를 기다렸지만, 병실 문을 오가는 사람은 은숙뿐이었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미영은 은숙 가게로 왔지만, 끼니를 거르고 말문을 닫아버렸다.


영재는 미영이 은숙 가게로 갔다는 소식을 숙희에게 알려 주었지만, 숙희는 영재 말을 개의치 않고, 아들 석진의 사진을 품에 안고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다. 벌써 두 달여간 숙희는 아들 방에서 울다, 지쳐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 눈물 마른 곡소리를 내며 석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희영, 희옥은 남동생 석진의 죽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희애, 희선은 석진이 늘 그랬듯, 병원에 있을 것만 같았다. 석진의 죽음은 온 집안을 어둠으로 둘러 누르는 재앙의 서막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문밖에 미영 학생이 와 있습니다.”

운전기사의 나지막한 말에 영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고, 아버지 침묵을 뒤로하고, 희영이 대문으로 뛰어나갔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너 때문에 석진이가 죽었는데….”

대문을 거세게 열고 나온 희영은, 미영의 옷이 찢어지도록 흔들어 대며 오열했다. 미영은 희영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 내며 서러운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었다. 뒤따라 나온 영재는 미영에게서 희영을 붙잡아 떼 내어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운전기사는 미영을 차에 태워 은숙의 분식점 앞에 내려 주고 갔다. 미영은 여러 번 영재 집을 찾아 애처로운 눈물을 쏟았지만, 아무도 닫혀 있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었다.


말을 잃고 시름시름 앓아누운 미영을 지켜보는 은숙은 가슴이 뜯겨 나가는 고통으로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켜다, 견디지 못하고 영재를 찾아갔다.

“다 제 잘못이에요. 어미 될 자격 없는 년이 어미 노릇하겠다고 욕심을 부렸어요.”

은숙은 사고 이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을 혼자 지키면서, 그동안 미영의 존재가 그 집안에서 어떠했는지 짐작되었다. 미영이 얼마나 홀대받고 살았을까를 생각하니, 괜한 화가 치밀어 영재에게 찾아가 미영을 자신이 키우겠다, 큰소리쳤었다. 영재는 그런 은숙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했었다.


“댁에서 다시 미영이 거두어 주세요. 제가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당연히 우리 집 핏줄인데, 우리 집에서 거두어야 할 아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제 아내도, 저희 아이들도 석진이 일로 큰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눈칫밥 먹는 것보다는 환경이 어렵더라도 생모 애정을 받고 커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미영이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양육비와 학비는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반기지 않는 식구들 천덕꾸러기로 사는 것보다는, 우리 식구들에 대한 상처가 원동력이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키워주세요.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라 어떤 동기부여가 생기면 집념을 가지고 살아 낼 겁니다.”

“선생님, 그러면 미영이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선생님께서 미영이에게 모진 말이라도 좀 해 줘야 아이가 포기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 사이 미영이에게 정이 들어, 저 역시 미영이 얼굴을 보면 모질게 못 할 것 같습니다. 자기를 외면하는 저희 집안 때문이라도 독하게 마음먹고 꼭 성공하라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저희 형님 아이니, 친권은 저희 쪽에 그대로 두고 양육권만 드리는 것으로 서류 정리도 할까 합니다. 변호사가 찾아가면 절차에 따라 정리해 주십시오.”


영재는 미영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워 달라며 은숙에게 거액을 주었고, 은숙은 영재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웃 도시에 살림집이 딸린 번듯한 가게를 얻어 이사했다. 미영은 여전히 은숙과 말을 하지 않았고, 기운이 없었다. 그런 미영에게 은숙은 모진 엄마가 되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네가 아들이었으면 모를까? 그 댁에서 너 다시 찾을 것 같아? 천한 어미 만난 게 죄다 생각하고 어리광 그만 부려.”

미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숙희처럼 따뜻하고 지적인 엄마가 계속 자기 엄마이길 바랐고, 영재를 아버지로 부르고 싶었다. 똑똑한 언니들이 많은 집 딸로, 약방 집 어르신 댁 아이로 살고 싶었다.




미영은 늘 꿈을 꾼다.

약방 집 뒷마당에서 숙희와 이불 빨래를 널며 나누었던 대화 속 약속을 반복해서 보고, 듣는다. 영재 병원 진료실에서 영재가 미영에게 삶은 달걀 껍데기를 벗겨 입에 넣어 주고, 빨대를 꽂은 사이다병을 손에 쥐여주며 미소를 짓던 영재를 반복해서 본다. 글자를 알려주는 할머니는 미영에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는 미영을 보며 큰아들을 떠 올리듯 당신 핏줄이라는 확신에 찬 얼굴로 미영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국에서 사 온 희영의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현상해 온 사진 속에는 미영의 일상도 담겨 있었고, 희옥은 오줌싸개 미영을 불평 없이 자기 방에서 재워주었었다. 희애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학용품을 희선에게만 주는 듯하면서도 미영에게도 슬쩍 나누어 주었고, 체구가 왜소해 미영과 비슷한 치수 옷을 입는 희선은 자기가 입지 않는 옷을 미영의 방에 슬쩍 던져 놓으며, 버리든지! 가지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가끔 새 옷까지 나누어 주었다. 석진은 언니들 냉대를 견뎌내는 미영에게 언제나 친절했고, 그날도 미영에게 언니들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며 힘내라고 격려해 주었었다. 자신이 그날 행복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마음이 들뜨지 않았더라면, 기사 아저씨에게 자랑하려 뛰어가지만 않았더라면…. 매일 후회의 몽환(夢幻) 속에 갇혀 있어야, 현실을 살아 낼 수 있을 만큼 현실은 최악의 지옥이었다.


석철은 미영을 핑계 삼아 영재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원 기물을 파손하고 돈을 얻어 내기 위해 공갈 협박을 일삼았다. 영재는 그런 석철을 신고해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석철의 횡포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석철은 공갈 협박, 기물파손, 영업 방해 등으로 일 년여간 감옥에 보내져 징역을 살고 나왔다.

“내가 한의사 그 새끼 그냥 둘 줄 알아? 두고 봐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석철은 학교가 끝나고 나오는 미영과 정아를 차에 태워 동네에서 멀지 않은 보육원 앞에 데리고 가 내려놓았다.

“너희들 여기 있으면 누군가 찾으러 올 거야. 오래 안 걸릴 거야.”

은숙은 늦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미영과 정아 대신, 술에 취한 석철이 출소해 이사한 집을 찾아내 돌아온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신 돈 많이 생겼네! 이런 가게도 꾸리고 집도 있고…. 내가 그렇게 사업 자급 좀 해 달라고 할 때는 나 같은 놈한테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며, 감방에 처넣어 버렸던 새끼가 당신한테는 꽤 후하게 줬네…. 딸년들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니까, 약방 집에 가서 미영이 있는 곳 알고 싶으면 돈 만들어 오라고 해.”

“애들 어디 있어요? 그 애들이 무슨 잘못이라고 애들한테까지 이래요? 그리고 제발 약방 집에는 그만 찾아가세요. 그 어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요?”

“당신 서방 감옥까지 보낸 놈이야. 나 없는 동안 그놈하고 붙어먹었지? 그놈 하고 붙어먹고 가게 받았어? 배운 의사 놈하고 하니까 좋았어?”

“애들 어디 있는지나 말해요?”

“이 년이 서방이 왔으면 술상부터 봐 와야지. 음 그놈하고 붙어먹고 보니, 나 같은 놈은 무시해도 된다는 거지? 내가 오늘 네 몸에 물들여놓은 그놈 흔적을 다 지워주지.”


그날 밤 석철은 알몸으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석철의 무참한 성적 학대와 폭력으로 처참하게 늘어져 있던 은숙은, 이웃집 사람들의 신고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석철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살결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몸뚱이는 검붉은 멍 자국을 입고, 한쪽 눈은 튀어나올 듯 부풀어 있는 은숙에게 의사는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아 보라고 권했다.

“선생님 퇴원해야 하는데….”

“안 됩니다.”

“아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을 형편이 아니에요.”


은숙은 의사의 말류에도 개의치 않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집 근처에 영재 차가 보였고, 운전기사는 은숙을 보고 차에서 내렸다. 은숙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가서 뜯어져 부서진 문짝을 치우고 마루에 은숙을 앉혔다. 그는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은숙에게 물었다.

“그 사람 출소한다는 날짜가 되어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병원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사님, 제 몸뚱이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좀 찾아 주세요. 이놈의 인간이 애들을 어디로 보냈는지, 어제 학교 끝나고 두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른에게 애들 좀 찾아달라 부탁드려 주세요.”


영재는 운전기사에게 전해 듣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석철을 찾았다.

“애들 어디 있습니까?”

“나 감옥에 보내고, 내 마누라 하고 붙어먹었지? 좋았냐? 그년이 다른 건 몰라도 속궁합은 남자한테 딱 좋거든. 내 마누라 하고 놀아난 것까지 돈 만들어 오면 내가 미영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지.”

“당신 감옥으로 다시 가고 싶어요?”

“감방 가서 살아 보니 살만하던데, 한 번 갔다 왔는데, 두 번 못 가겠어.”

석철은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이었다. 영재는 그런 석철에게 끌려가고 싶지도, 원하는 것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미영과 정아 행방은 따로 알아볼 요량으로 더는 석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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