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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보육원’ 나무 팻말 앞에 미영과 정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장을 대신에 둘러쳐진 탱자나무 가시넝쿨 위에는 모양도 크기도 따로따로 인 빨래가 널려져 있고, 마당에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었다. 정아가 울먹이자, 미영은 정아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언니와 같이 있잖아. 너희 아빠가 누군가 데리러 온다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울지 마.”
미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영재와 숙희가 알게 되면 반듯이 자기를 찾으러 올 것이라 여겼고, 자기를 약방 집으로 다시 데려 걸 것 같았다. 정아를 데리고 팻말이 걸린 시멘트 기둥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로 그림도 그려주고 글자도 가르쳐주며, 정아에게 불안함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몽환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정아야, 무서울 때는 무서운 꿈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에서 깨면 기억도 나지 않는…. 배고플 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떠 올려 보는 거야. 그래도 생각이 안 나면 이렇게 그려 보는 거야. 내 앞에 밥상을 그리고 밥상 위에 어떤 음식을 차릴지 그려 보는 거지. 누군가 보고 싶은데, 얼굴이 떠올려지지 않을 때는, 그 사람과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떠 올려 보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그 사람 음성과 표정, 느낌을 찬찬히 생각하고 그려 보는 거야.”
“언니, 나도 그런 거 할 줄 알아. 아빠 목소리가 커지면, 나는 옷장에 숨어서 귀를 막고 빨리 지나가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거든. 그러다 보면, 아빠 무서운 음성도 엄마 비명도 없어져.”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막대기로 흙바닥에 그려지는 그림도, 글자도,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미영과 정아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너희들 누구니?” 보육원 안에서 나온 여자가 물었다.
“아빠가 데리러 온댔어요.”
정아의 대답에 여자는 미영과 정아처럼 보육원 앞에 두고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긴 어른들이 많았던 것처럼, 정아 말을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미영과 정아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자에게 이끌려 들어갔다.
정아는 밥을 입에 씹어 넘기면서도 울먹였고, 자다 말고 일어나 미영에게 집에 가자며 떼를 쓰기도 했다. 미영은 자신이 초등학교 4학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현실에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을 껑충 뛰어넘어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보육원에서 지낸 지 일주일여간 되어 가던 어느 날, 정아의 짜증이 섞긴 떼를 겨우 타이르고 달래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 교사가 미영과 정아를 조용하게 흔들어 깨워 밖으로 나오게 했다. 자가용 불빛 앞에 영재 운전기사와 은숙이 와 있었다. 정아는 은숙에게 안겨 뒷좌석에 올랐고, 미영은 조수석에 앉아 영재와 숙희에 대한 원망으로 눈물 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 어둠에 영재 자가용 불빛이 보였고, 영재와 숙희가 오지 않았을까, 내심 설레는 마음으로 추적추적 어둠 속을 급히 걸어 다가갔을 때, 은숙과 운전기사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미영은 영재와 숙희가 정말 다시는 자기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며, 괜스레 순득의 얼굴이 떠올라 한없이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미영은 더는 영재 집도 병원도 궁금해하지도 찾지도 않았다. 영재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선거운동 때 먼발치에서 숙희 웃는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었다. 희영은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정착해 살고 있고, 희옥은 서울 명문대를 졸업했고, 희애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 법대에 다닌다고 했다. 희선은 숙희 영향으로 예술 고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노환(老患)으로 기력이 많이 약해져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라고 했다. 중학생이 된 미영은, 중학교가 없는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하고 있는 상희를 다시 만났고, 상희를 통해 약방 집 상황을 대충 들을 수 있었다.
미영은 스스로 몽환 속에 갇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우수한 성적표를 받는 날이면, 약방 집 대문을 열고 마당에 뛰어들어, 문발을 내려놓고 책을 보는 할머니에게 보여 주는... 음악 선생님이 목소리가 예쁘다며 성악을 전공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은 날은 피아노를 치는 숙희 옆에 서서 멋진 노래를 부르는... 아니다, 영재처럼 흰 가운을 입고 진지하게 환자를 보는 한의사가 되는 꿈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언니들처럼 명문대생이 되면, 영재가 얼마나 뿌듯하게 웃어 줄까?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면, 언니들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미영은, 자신의 미래를 그림으로 그려내고 글로 표현했었다. 미술 선생님은 그림을 전공해 보라고 했고, 국어 선생님은 글 쓰는 작가가 되어 보라고 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도시에서 지방 유지인 약방 집과 미영의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무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소재거리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대를 거치고 걸러져 미영이 약방 집 업둥이였다는 소문부터 영재가 바람피워 낳아 온 자식이라는… 은숙과 영재가 사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그런 은숙 때문에 석철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툭하면 영재 병원 주변을 배회한다는… 작은 소도시 공기 속에 섞여 다니는 이야기는 영재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더욱더 공격적이었고 유치했었다. 하지만, 영재는 형 덕재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 조카 미영을 거두지 못한 죄책감으로 묵묵히 받아 담아 넘겼었다.
미영도 학교 일부 아이들이 미영에게 소문을 왜곡해 모욕감을 안기기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약방 집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로 잊히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미영은 석철의 폭력과 은숙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 집보다는 학교가 안전하다, 여기며 학업에 몰입했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 노름빚에 집도 가게도 다 팔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사채까지 끌어다 써서, 온 식구가 이렇게 여관 월세방에 살게 해 놓고 아직도 노름을 못 끊어.”
“이 년이 미쳤지? 약방 집에 가서 돈이나 좀 받아 오라고”
술에 취한 석철은 정신병자 같았다. 알몸으로 흉기를 휘두르며 은숙과 미영, 정아를 위협했고, 담벼락 밖의 사람들은 그런 석철이 두려워 아무도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신고라도 해서 경찰이 오는 날은 석철을 잠시 파출소에 분리하고, 술이 깨면 돌려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석철은 가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미영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고, 미영은 하굣길에 습관처럼 교문 밖에 석철이 있는지를 살펴야 했었다. 어느 날은 석철이 술이 떡이 되어 학교 교실에 들이닥친 적이 있어, 남자 선생님들이 석철을 끌어내 경찰에 넘긴 적도 있었다.
그날도 석철은 술에 취해 장맛비가 거센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영재 자가용은 신호 대기를 하고 서서 위태로운 석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철이 영재 차를 발견하고 차도를 가로질러 뛰어든 순간, 덤프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져 석철을 덮치고 말았다. 석철은 서울 대학병원에서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과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장애인이 된 석철은 더 거친 폭력으로 은숙과 정아를 괴롭혔고, 미영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약방 집 탓이라며 미영에게 책임을 지라고 몰아세웠다. 은숙은 석철이 입원 중인 병원에서 석철의 발짝과 구타로 스러졌고, 여러 검사 결과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미영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엎치고 덮치면서 몽환에 들어갈 기력조차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월세가 밀린 단칸방에 장애인 석철의 주정과 폭력, 병으로 드러누워 버린 은숙 옆에서 훌쩍이는 정아 모습까지…. 가난과 폭력, 질병과 우울함이 생존의 끈을 붙잡고 공존해야 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지치고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