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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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은숙은 수술도 치료도 포기한 채 삶의 자락을 내려놓았고, 석철은 미영에게 약방 집에 가서 돈을 구해 오라 성화였다. 정아는 삶을 포기한 엄마 은숙 옆에서 자기도 같이 죽겠다며 눈물 마를 날이 없었고 미영은 고등학교 진학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영을 아끼던 학교 담임은 미영이 사는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책으로, 시험으로 학생 선발을 하는 도시에 있는 유명 자사고 입학을 권했었다. 시험에 합격만 하면, 기숙 생활이 가능하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환경에서 미영이 더는 과거 소문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담임은 영재 병원을 찾아 미영에 관한 의견을 전했고, 영재도 담임에게 미영을 그렇게 설득해 달라 부탁했었다.




미영은 합격한 자사고 입학허가서를 손에 쥐고, 영재 병원을 찾아와 영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미영이 약방 집 아이가 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영을 대하는 패턴은 거의 비슷했다. 평생 영재 차를 몰고 있는 기사 아저씨는 우연히라도 미영과 마주칠 때면, 억지스럽게 미영을 편안하게 대하려 애썼고, 오랜 세월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 아주머니도 오랜만에 병원을 찾은 미영에게 과한 친절로 대해 주었지만, 시선은 맞추려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

“어쩐 일로?”

“......”

영재의 사무적인 물음에 미영은 입술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았던 서운한 감정이 불쑥 올라와, 아무 말도 못 하고 넘쳐나는 눈물만 훔치다,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영재는 미영이 떠난 자리에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다 떨어뜨리고 간, 종이를 주워 펴 보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미영의 들썩이는 어깨가 유난히 추워 보여 혼잣말을 해 본다.

“겨울 외투가 없나….”


미영은 영재 병원을 나와 걷는 내내 눈물이 걷히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져 걸음을 재촉할 수 없어, 후미진 골목 구석으로 뛰어 들어가 웅크리고 앉자, 둑이 무너지듯 펑펑 울음이 솟구쳤다. 왜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았냐고? 자기를 그렇게까지 외면해야 했냐고 따지고 묻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입학금 때문에 영재를 찾아간 지금은 왜 이리도 한없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올라오는지…. 자기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약방 집이, 그리고 영재 아빠가 무척이나 그리웠던 것은 분명했다.

영재는 미영이 다녀가기 전 이미 미영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석철 시선을 피해 도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은숙을 통해 보냈던 미영의 생활비와 학비가 고스란히 석철의 도박판으로 술값으로 들어가고 있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변호사를 통해 미영에게 직접 전해질 수 있는 절차를 찾아 만들고 있었다.




은숙은 영재 도움으로 서울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담당 전문의에게 희망적인 소견은 들을 수 없었다. 미영은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어,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희는 학업에 뜻이 없었고,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태겠다며, 대도시에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공장일을 하고 있었다. 가끔 어설픈 화장을 하고 미영을 찾아와 돈 버는 직장인이라며 미영에게 간식을 사 주곤 했다.

“약방 집 할머니 돌아가셨대, 너는 못 가 보지? 미국 큰 언니도 나왔다던데….”

“할머니가 나 궁금하기나 하시겠어? 초등학교 3학년 때 보고 한 번도 못 봤는데….”

미영이 기억하는 할머니는, 전갈한 한복 차림으로 곱게 빗은 쪽 머리에 겸손한 은비녀를 하고, 안경을 낀 고운 자태로 늘 책을 읽었었다. 그리고 가끔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화단에 나와 화초를 가꾸었었다. 하루는 화단에 핀 봉숭아꽃 한줄기가 무리를 벗어나 화단 담장에 위태롭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조심스레 뿌리째 뽑아 무리 속에 다시 심어 주며 말했었다.

“사람이나 풀이나 제 핏줄 무리에 있어야 빛깔 좋은 꽃을 피우는 법이지.”

어렸던 미영은 할머니 말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약방 집에서 나와 살면서 문득문득 할머니 말이 생각났었다. 그리고 부정할 수도 없고,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린 자기 시간을 떠 올리고 있었다.

“미영, 너 가 볼 거야?”

“누가 반긴다고? 괜히 눈에 띄었다, 여러 사람 기분 우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영재 선거 때 잠시 본 숙희 웃는 얼굴이 자신으로 인해 어두워질까 두려웠다. 다른 누구에게도 자기를 통해 죽은 오빠 석진을 되새겨 주고 싶지 않았었다.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해.”

“약방 집에서 너 학비하고 생활비 보내주지 않아?”

은숙은 수술 이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고, 석철은 불편해진 몸에 적응하지 못해 바깥출입이 어려워 도박판에는 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술독에 빠져 살고 있었다. 중학생이 된 정아는 미영의 영향으로 학교 공부는 곧잘 하고 있었고, 그런 정아 생활비와 학비는 미영이 지원받는 생활비를 아껴 나누고 아르바이트를 해 채워주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미영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뻔했다.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3시간 정도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었고, 주말에는 입시 종합학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출문제집을 얻어 보며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영은 자기 형편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또 무슨 전공을 해야 할지 은근한 근심이 쌓여가고 있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힘들지 않아?”
“어릴 때 그 집에서 좋은 약 많이 먹어서 그런지! 체력은 좋은 것 같아.”

“하긴 나도 집은 가난해서 먹을 게 없었는데, 우리 엄마 아버지가 뭔지도 모르는 약초 물을 달여놓고 다녀서 물처럼 마셨던 약초 물 때문인지! 우리 공장에서 내가 제일 체력이 좋다니까.”

상희 말은 여전히 빈말은 아녔다. 미영이 살았던 동네는 벼농사와 약초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집마다 몸에 좋은 약초 달여놓은 물을 냉수처럼 마셨었다. 그 덕에 동네 아이들이 잔병치레가 없다며, 오래전 미영은 영재와 숙희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미영아, 방학 때는 집에 가야지? 기숙사에 있을 수 없잖아. 좁고 초라하긴 한데, 내 자취방에 와 있을래?”

“방학 때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지 좀 알아봐 줘.”

“공장일을 할 수 있겠어? 일도 일이지만, 공장 환경도 험하고 사람들이 거칠어서….”

“괜찮아, 뭐든 할 수 있어. 우리 집 환경보다 험하겠어?”

“하긴, 알았어.”

미영은 돈도 아쉬웠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는, 야윌 대로 야위어 있는 은숙은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의미 없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한 번씩 다녀가는 미영에게 공허한 눈빛으로 말했었다.

“미영아, 너는 나 같은 인간하고는 다른 사람이다. 너는 내 배만 빌려 나왔지, 너는 뼈대 있는 집 자존이라는 것 잊지 말고, 그 집안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공해야 한다.”

석철에게 실컷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미영에게 수치스러워 쌍스러운 말로 석철 욕을 했던 은숙 눈동자에는 분노라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은숙의 눈은 최소한의 삶에 대한 애착조차 사라진 듯했다. 미영은 그런 은숙 옆에 있노라면, 자신도 그 고통을 동반한 절망의 기(氣)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석철의 잘린 팔과 다리는 죽은 석진을 떠올리게 했다. 착한 석진은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는데, 매일 어디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석철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석철을 마주할 때마다 자기가 숨기고 있는 생각이 들킬까 봐 무서웠다. 그런 엄마를 아빠를 불쌍하다고 말하며 눈물이 많은 정아를 보면, 미영은 괜한 짜증이 치밀었다. 정아의 약한 마음 때문이라 여겼지만, 미영은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온전한 엄마 아빠를 가져보지 못한 미영은 정아를 보며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부모에 대한 애증이 엿보여 때론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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