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녀석이 싫다.

사라지다

by 은하연

나는 이 녀석이 너무 싫다.


이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처음 본 것이 5년쯤 되었을까? 이 녀석에게 느껴지는 첫인상은 차갑고 낯설다였다. 나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그랬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이 녀석이 자꾸 내 눈에 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녀석이 싫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도 싫었지만 가장 싫은 건 도대체 융통성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녀석과 마주하면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녀석은 내가 앞에서 허둥대며 헤매고 있어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일은 전혀 없다. 그저 남일이라는 듯 서 있기만 한다. 그 불친절함이 싫다. 이 녀석 앞에만 서면 자꾸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싫었다.


이제 어디를 가든지 여기저기 보이는 이 녀석은

바로


키오스크!!!!!!



나는 키오스크가 싫다. 이 기계를 보면 차갑고 냉정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 오는 듯하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키오스크 앞에 서면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처음 간 곳에서 키오스크를 만나면 나는 긴장부터 한다. 내가 원하는 메뉴가 어느 구석에 있는지 여기저기 눌러봐도 찾기 힘들고, 이렇게 시간만 흘러가면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난다. 특히 내 뒤에 긴 줄이 늘어서 있으면 더 긴장하게 된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메뉴를 찾기가 힘들어서 대충 누르는 일도 있다.


어쩌면 나는 키오스크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싫은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주문하는 간단한 일 앞에서도 손끝이 바빠지고 마음이 먼저 조급해지는 나 자신이 싫다.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은 나를 재촉하는듯하고 화면 속 글자들은 유난히 차갑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 무엇을 드릴까요?"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주인과 잠깐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마치던 그 짧은 순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있었다. 지금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대신 말할 기회가 사라졌다. 점점 사람사이의 온기는 사라지고 기계가 그것을 채우고 있다.


키오스크는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내가 잘못 누르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조금의 융통성도 없고 냉정하다. 도움이 필요해도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왠지 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키오스크 앞에서는 나는 소비자가 아니라 기계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맞아주는 일은 거의 없다. 언제나 가게에서 나를 맞아 주는 것은 우두커니 서 있는 키오스크이다. 심지어 식당에도 테이블마다 키오스크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새 나도 사람보다는 키오스크를 먼저 찾게 되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맞다.


젊은 친구들은 키오스크가 편리하다고 한다. 키오스크는 빠르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실수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오히려 사람이 맞이하는 곳은 부담스럽고 어렵다고 한다. 그 말이 전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키오스크는 불편이 아니라 편리함이고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자유일지도 모른다. 이런 작은 것에도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사람모양을 한 로봇이 주문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삭막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도 사라져 갈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키오스크가 싫다.

편리함 속에 숨은 조급함이 싫고, 말을 잃어버린 공간이 싫다. 기술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 눈치를 보게 되는 순간이 싫은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버튼보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먼저인 곳, 속도보다는 사람이 먼저인 곳에서 줄을 서고 싶다. 비록 조금 기다리고 불편하더라도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사라-지다

동사

1 【…에서】【 …으로】

현상이나 물체의 자취 따위가 없어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인파 가운데 소안의 흰 아오자이가 팔랑대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황석영, 무기의 그늘≫

달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더 보기

「1」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없어지다.

집안에 걱정이 사라지다.

오빠가 무사히 돌아와 어머니의 시름이 사라졌다.

큰형이 시험에 또 떨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2」 ‘죽다’를 달리 이르는 말.


한 걸음 더

·‘사라지다’는 ‘사르다’의 옛말 ‘살다’에 ‘-어지다’가 결합한 말이지만 ‘살아지다’로 적지 않고 ‘사라지다’로 적는다. 이는 두 개의 용언이 어울려 한 개의 용언이 될 적에, 앞말의 본뜻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 원형을 밝혀 적고, 그 본뜻에서 멀어진 것은 밝혀 적지 않는다는 규정(한글 맞춤법 제15항)에 따른 것이다.

< 출처 국립어학원 표준국어대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