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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변은 아버지가 맡긴 임무를 잘해내고 싶었다. 돈은 이렇게 든 저렇게 든 쓰라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돈으로 사람 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라는 인상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던 아버지의 음성이 변의 귓가를 맴돌았다. 결과물을 내야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변은 전국에 있는 모든 지점에 광고를 냈다. 새로운 브랜드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채택이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직원에게는 브랜드 1호점을 내 준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엄청난 혜택에 솔깃해진 사람들은 두서없는 내용들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2주가 지나도록 건질만한 내용은 없고 변은 점점 초조해졌다. 불안감이 더해질 때마다 변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 여인은 가만히 다가와 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때로는 나무 밑에서,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여인은 언제 어디서든 평온을 유지한 채 변의 옆에 있었다. 다음은 또 어떤 장소로 안내할지 기대되는 마음 때문에 변은 계속해서 그림을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은 이번에 반드시 번듯한 결과를 내서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변에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림을 사주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마음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변은 사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대단한 업적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자꾸만 홀쭉해지는 볼에 예민해질 즈음, 반갑게도 서울 마포구에서 성업 중인 한 지점 요리사가 보내온 서류가 변의 눈에 들어왔다. 이름부터 생소한 <산갈치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이라는데 꾸물대던 호기심이 그제서 서서히 일어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산갈치는 전설이 많은 바다생물이었다. 그 전설을 극대화 시켜 신비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 다음 재료로 이용되는 모든 생선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효능을 소개하며 건강한 음식만을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하자는 내용이었다. 특히 산갈치가 보름은 바다에, 보름은 산에 산다는 전설에 입각해 산에서 나는 나물종류와 해산물류를 함께 이용한 메뉴를 개발해서 한식과 일식이 조화를 이룬 퓨전 음식점의 방향으로 나가면 좋겠다는 내용이 이어졌는데 변은 그 대목에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존에 운영하고 있던 일식집의 노하우를 이용할 수 있으면서도 몇 가지만 추가하면 완전히 차별화 된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게다가 산갈치의 색과 크기를 바탕으로 한 인테리어와 홍보 전략까지 세세히 짜여 있어 변이 수고롭게 할 일은 진짜 산갈치를 구하는 일 뿐이었다. 어차피 본보기로 1호점만 살아있는 산갈치를 보여주고 나머지 지점들은 모형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지라 여차하면 1호점도 모형으로 대체하면 되기 때문에 변은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변은 전국지점에 공모는 마감되었고 채택된 아이디어는 추후 발표한다는 공지를 보냈다. 그리고 <산갈치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을 제출한 그 요리사를 개별적으로 연락해 본사로 불러들였다. 변은 요리사가 도착하기 전 그의 이력서를 훑어보았다.

“이윤? 이름이 나처럼 외자네. 거기다 나이까지 똑같고. 그러고 보니 절대 손해는 안 볼 이름이구만. 후후.”

변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은 정시에 도착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떡 벌어진 어깨가 변을 향하고 있었다. 변은 최대한 호기롭게 보이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윤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대화는 어젯밤 변이 연습한 그대로 진행되었다. 긴 얘기가 필요치 않았다. 윤은 특별한 질문 없이 모든 것을 수긍했다. 이거야말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웃음은 빙글빙글 변의 입 속에서 돌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만 만족시키면 된다는 생각을 하자 변의 눈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웅장한 산갈치를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는 변에게 한 걸음에 달려와 안길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변의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잠시 후, 변은 윤의 가마를 바라보며 역시 사람은 돈과 권력 앞에 서면 다 똑같아지는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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