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군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윤이 가져다 준 열장도 넘는 산갈치에 대한 기사를 읽느라 마침 지치고 있을 때였다. 편지지에는 여전히 둥근 모양새를 하고 한 쪽으로 찌그러져 있는 형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 틈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이 굴러 나왔다. 서울과 동해라는 글자 사이에 깜찍하게도 화살표가 끼어있다. 핵심을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지나 어젯밤, 등산하다 엄청 큰 황금물고기를 잡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에 이르렀다. 결론은 역시나 난 이제 산으로 간다는 말이었다. 넓어진 콧구멍 사이로 머뭇거리던 바람이 뛰쳐나왔다. 동시에 얼굴에는 八자가 새겨졌다. 꿈 때문인 것처럼 말은 했지만 바다가 슬슬 지겨워진 모양이었다. 딱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없어도 나는 멍군이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 머무는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멍군에게도, 내게도, 언제나 여행은 새로운 출발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답장을 쓰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어쩌면 편지보다 멍군이 일찍 도착할지도 몰랐다. 난 편지 쓰는 걸 좋아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멍군은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멍군은 내 덕분에 외로운 군 생활을 잘 견뎠다고 했지만 나야말로 멍군 덕분에 고독한 예술의 길을 기분 좋게 걷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사람은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자유는 소중한 거라고, 전역하면 꿈만 보며 뛸 거라고, 멍군은 매번 강조, 또 강조 했더랬다. 이상하게도 모든 경험은 자기를 성숙하게 해 준다는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최면에 가까운 얘기들이 말라가는 화분 같던 내 마음에 촉촉한 수분이 되었다. 우리는 꾸준해야 했고 이렇다 할 결과물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어야 했다. 그게 바로 예술 정신이라 믿으면서 꼬르륵대는 배 만큼은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수차례 맞이했다. 사실 그럼에도 한결같기 위해서는 변사장과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인이 있는 풍경>이 그의 눈에 띤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멍군은 변사장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비난 섞인 말투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때로 변사장이 주문한 그림이 내키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되도록 멍군을 만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작아지는 것이 싫었다. 생활과 작품 활동이 동시에 가능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곤 했다. 윤이 가져다 준 산갈치에 대한 자료들은 어느새 한 쪽 구석에서 코 푼 휴지처럼 천대받고 있었다. 의무적으로 꾸역꾸역 머릿속으로 밀어 넣어보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답장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윤에게 미안해졌다. 윤과 나 사이에는 시간이 갈 수록 윤은 모를, 미안함만큼의 거리감이 생성되고 있었다. 한 번에 흡수하기 힘든 문장들을 세, 네 번씩 꼭꼭 씹어 삼켰다. 모든 내용을 소화하기까지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온 몸을 C자가 되도록 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은 위 아래로 움직이며 스스로에게 해방감을 주려 애썼다. 산갈치에 대한 이론이 뇌를 가득 메울수록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지식은 늘어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매일이 반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