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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은

변은 조심스럽게 산갈치 그림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물었다. 사실 시작도 못했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렇게 맥 놓고 있다가는 된통 망신을 당할 것이 뻔했다. 일단 둘러댈 말을 찾아 이 상황을 넘길지, 아니면 사실대로 말하고 시립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포기할지 몇 초 안에 결정해야 했다. 무엇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을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부탁드렸던 산갈치 그림은 원하시면 완성하셔도 되고 아니시면 그만 그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주문을 취소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 값은 그대로 쳐 드리는 것으로 하고 새로운 걸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디자인 하시는 분도 아닌데 이런 거 부탁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먼저 의논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새로운 브랜드출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 브랜드를 대표하는 이미지랑 간판 디자인이 필요한데 간판 디자인은 인테리어 쪽하고 얘기해도 되지만 대표 이미지 디자인은 작가님이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가능할까요?”

이런. 이건 생각지도 못한 돌파구였다. 현재의 위기를 티 나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닭 벼슬 머리를 한 산갈치의 유연한 몸놀림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녀석은 온 몸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산갈치에서 솜털 같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있었다. 변은 개인전시는 내가 준비 되는대로 연결시켜주겠다고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을 휘젓던 그 녀석은 금세 지쳤는지 어느새 종이 위에 올라와 쉬고 있었다.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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