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로 21년째 '존버 vs 열애'중?

험난한 방송가에서 반평생 버텨 낸 나의 이야기

by 온작가

10년이면 강산이 한 번 바뀐다고 했는데 요즘 10년은 예전 10년과 또 어마 무시하게 다르니,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바뀐 게 아니라.. 어떤 세월이라 말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오직 '방송작가'라는 꿈 밖에 없던 '대구 촌년'은 1999년, 정말이지 부푼 가슴을 안고 상경! 꿈에 닿는 직선코스라 판단한 '방송극작과 입학'을 택했고 졸업과 동시에 2001년 드디어, 끝내, 결국 막내작가가 됐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쉼 없이 21년을 달렸다. 아, 출산 2주 전부터 출산 한 달 후까지 총 한 달 반 정도를 쉬긴 쉬었네...


방송작가는 대부분 프리랜서이기에 많은 방송작가들은 프로그램 이동 전이나 프로그램 진행 중에도 몇 주 혹은 몇 달의 '휴식기'를 갖는다. 개인적인 일처리를 하기도 하고 학업 또는 긴 여행을 할 수도 있는 시간. 그런데 난 위에서 언급했듯 출산 전후의 시간 외엔 한 번도 그렇게 하질 못 했다.


왜 한 번도 쉬질 못 했을까?


이런 질문을 새삼스럽게 스스로에게 해본 것도 최근의 일인데, 딱히 쉴 이유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주로 '연예뉴스' 프로그램을 많이 해 왔던 나. '몇 부작 짜리'... 처음부터 운명이 정해진 작품을 해본 적도 없고 시청률이나 여타의 이유로 하루아침에 프로그램 막이 내린 일도 다행히 없었다. 연예 뉴스거리는 늘 있었고, 그래서 한 프로그램을 5-6년, 그 이상도 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을까.


'먹고사는 일'도 내게는 늘 과제였다. 오랜 자취러였기에 숨만 쉬고 살아도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했고 방송작가 외 다른 일로 먹고산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메인작가 입봉을 하고도 10년 넘는 세월이 쌓이는 동안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있다.


'언니는 진짜 보살 같아요'

'박 작가는 정말 해탈한 사람 같아'...


마흔이란 나이를 두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뜻의 '불혹'이란 말을 쓰는데, 공교롭게도 이제 만 나이까지 빼박 마흔인 나여서, 정말 흔들림이 없게 된 걸까? 흔들림이 없는 척을 하는 걸까?


둘 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한 프로그램을 오랜 기간씩 해 온 나를 유난히 힘들게 한 두 남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t 모 방송사에서 일할 때 메인 피디였던 A 피디, 또 한 사람은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 B 피디. A는 분노 조절 장애, B는 폭풍 막말 시전...


그들은 도합 13년 정도 나를 괴롭혔고 또 괴롭히고 있는데, 나도 처음엔 잠자리에 누워서 허공에 대고 욕을 해 보기도 했고 하염없이 울어보기도 했고 혼술도 아주 여러 날 마셔댔으며 후배 작가들과 어마어마하게 씹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만 피폐해져 갔고 그들에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령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든가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한다든가 벼락을 맞는다든가 그런 일...


아주 오래 여러 방법으로 나 스스로를 괴롭혀댄 끝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를 죽이지 말자, 나를 살리자, 나를 사랑하자...


스트레스를 준다 해도 받지 않으면 그만인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거의 세뇌시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다 보니 요즘엔 진짜 힘듦이 훨씬 덜해졌다. 회의 때 재수 없는 소릴 들어도 후배 작가들 앞에서 별 티를 내지도 않게 됐다. 나의 상한 감정이 그들의 감정까지 끌어내릴 권리는 없는 거니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진 못할지언정 악한 영향력이 있는 선배는 아니어야 하니까.


그렇게 내 감정을 컨트롤하다 보니 정말 별 거 아닌 일들이 됐고 아직도 완벽하진 않지만 많이 무뎌진 건 확실하다. 불혹이라는 나이처럼 진짜 흔들림이 적어진 것도 맞고 흔들림이 적어진 척 노력하는 것도 맞는 것.




누구였던가, 90년대 톱스타가 열애 중이라고 대서특필됐던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일과 열애 중'이라는 역대급 낚시 기사... 그래서 여성 팬들의 엄청난 공분을 샀었다.


분노 조절 장애인들과 프로 막말러들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방송작가'라는 네 글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서다. 그야말로 '방송 글'과 21년째 열애 중이라고나 할까.


'존버'와 '열애'... 너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사이 어디쯤에서 오늘도 난 꼿꼿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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