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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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도심보다 조금 빨리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간절함이요..?>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산자락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며 정민은 선재에게 물었다.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원동력은 간절함이죠. 그 마음이 과하면 욕망으로 불리기도 하지만요”
<제가 간절히 원하면, 누군가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간절히 원하느냐고..? 당연하다. 하지만 그만큼의 걱정도 함께 한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 그녀지만, 그렇게 해도 되는지, 그랬을 때 예라는 과연 괜찮을지 걱정이 앞서는 게 정민이라는 사내였다.
“만지고 싶어 하는 그 대상의 간절함이 더 중요하답니다. 죽은 자를 만지고 싶어 하는 산자의 간절함은 그리 흔한 감정이 아니니까요”
예라의 간절함이라.. 과연 그녀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까..? 그녀에게 난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한 학창 시절 동창에 불과한데..
“그 상대가 정민 씨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분의 인식에 따라 정민 씨의 존재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지요”
선재는 정민의 존재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정민을 다른 세계의 존재가 아닌 이승의 존재로 간절히 원한다면, 그를 죽은 자가 아닌 산자라고 인식한다면, 그녀의 간절함으로 그를 만질 수 있고, 그도 그녀를 만질 수 있다..고, 했다.
<하....>
이런 존재가 되어서도 욕심이라는 본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간절함이 아니라 그녀를 안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왜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를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건지.
왜 귀신이 되어서도 내 안의 그녀는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지.
<미친놈...>
자학하는 정민을 선재는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 애는.. 간절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그저 어둡고 힘든 터널을 빠져나온 상태라, 지쳐서 저 같은 존재에게도 말을 걸어주는 걸 거예요>
그렇다. 그래서일 거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
달라진 지금의 모습이 진짜 그 애 모습은 아니니까.
언젠간 다시 밝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거다. 정민 따위는 알 필요도, 마주할 이유도 없는 그런 생활로.
“그분에게 정민 씨가 필요한 존재인가 보네요. 어떤 면으로든”
<한 번도 그 애한테 그런 존재였던 적은 없어요. 저에게 그 애는.. 너무 깊이 박혀 이젠 꺼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지만..>
멀리 사라지는 해를 보며 정민은 말끝을 흐렸다.
할 수 있다면 이제라도 내 안을 채우고 있던 그녀를 뽑아버리고 싶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는 첫사랑이라는 감정 따위, 사라지는 저 해에게 던져 태워버리고 싶다.
벚꽃만 보면 그녀를 떠올렸던 시간들은 저주가 맞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를 더욱 괴롭게 할 뿐이니까.
상처받을까 겁먹고 그녀에게 나서기를 미뤘다. 좀 더 멋진 남자가 되어 고백하자고 자꾸만 시간을 늦췄다.
시간이라는 건 세상을 감싸고 있는 공기처럼 항상 존재하고 아무 때나 주어지는 줄 알았다.
한정적인 줄 모르고 미루기만 했던 시간이 사무치게 후회스러운 정민이었다.
조금 빨리 그 애 앞에 나서볼걸.. 아무 쓸모없는 후회가 또 후회스러웠다.
선재는 툭툭 위로하듯 정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지나간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다시 만난 인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제가 물고기처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정민 씨한테 드릴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네...>
“저는 항상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똑같은 인식을 갖고 있답니다. 물론 불철주야 수행에 정진한 결과이기도 하지요.. 나무아미타불... 홍 홍....”
선재는 장난기 섞인 선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고 합장했다.
'어... 지금 내 어깨를...?'
일어나 다시 걷는 선재를 바라보며 정민은 그녀가 토닥인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듯함이 아직 남아있었다.
*
제이는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빨리 사무실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저기압 상태인 제이였고 성 팀장은 왜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사십여 분 뒤 제이는 예라의 오피스텔 쪽으로 가는 지하철 출구에서 나와 건물을 지나쳐 공원으로 향했다.
가로등이 켜진 공원은 초저녁이어서 아직 어둡지 않았다.
드문드문 공원을 가로질러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가볍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이는 비어있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바로 뒤로 오피스텔 건물이 보이는 곳이었다.
예라도 퇴근을 위해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제이와 나눈 통화 때문에 종일 예라의 표정도 굳어있었다.
점심 배식 때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엔 줄곧 같은 표정이었다.
영양사의 장점이자 단점은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섞여 있지 않고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리사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꽤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반대로 그 때문에 학교 샘들과 빨리 친분을 쌓지 못하는 건, 예전의 예라였으면 아쉬워했을 부분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그런 현실이 더 고마웠다. 종일 제이 목소리가 떠올라 표정 관리가 안 됐으니까.
책상 정리를 마친 예라는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교문 밖으로 나온 예라는 폰을 꺼내 들고 고민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출퇴근 시간엔 버릇처럼 전화기를 켜 제이와 통화했다. 예라가 먼저 할 때도 있고 제이에게 걸려오기도 했다.
종일 밀린 수다를 떨기에 집까지 걸어가는 이 시간만 한때는 없었다.
“기집애..”
예라는 아직 울리지 않는 폰을 내려다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폰을 켜 최신 목록에 있는 제이의 이름을 누르려는데 드드드드- 드드드드-
잡고 있던 폰이 몸을 떨며 수신을 알렸다. 제이였다.
피- 하고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얼굴로 예라는 전화를 받았다.
“퇴근하고 계시다”
[공원 들어섰음?]
“막”
[니네 집 쳐다봐봐]
“뭐?”
갑자기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예라는 제이 말대로 고개를 들어 멀리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봤다.
[거기서 수직 낙하해 봐]
예라는 건물을 향했던 시선을 그대로 아래로 옮겼다. 멀찍이 공원 끄트머리 쪽 벤치에 제이가 앉아있었다.
“뭐야.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빨리 튀어오기나 해]
제이의 전화가 끊어졌다. 예라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종일 신경 쓰였으면서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말 한마디면 다 풀어지고 마는 그런 사이. 예라와 제이는 그런 친구 사이였으니까.
“집이 코앞인데 왜 여기 있어?”
예라는 제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뛰다시피 빨리 왔더니 숨이 좀 찼다.
“너만 있는 집 아니잖아”
“......”
“보이진 않지만, 정민이 있다며.. 이제 맘 편히 막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제이의 말속에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 바르셨다구...”
타박하는 예라의 말속에도 왠지 모를 미안함이 한 스푼 느껴졌다.
“야 근데, 무슨 귀신이 폰을 쓰냐?”
“자석 병따개 같은 거 움직일 수 있더라고”
“헐....”
기가 찬다는 듯한 제이의 표정이었다.
“제이야, 넌 안 보이니까 내가 이상해 보이는 거 이해하는데, 정민이 진짜 있어. 저 집에”
“..... 그래. 뭐 같이 병원도 다녀오고 했지 나도. 근데.. 근데 집에 돌아가서 혼자 생각해 보니까, 또 잘 모르겠어 나는..”
“걔가 다른 존재 같지가 않아. 그냥.. 똑같아 보여. 나랑 너처럼”
흔치 않은 예라의 표정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은 오랜만이다.
어느 대상, 특히 남자를 두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고등학교 시절 콩깍지가 쓰였을 때 이후 처음인 듯했다.
“근데 아니야. 정민인, 다른 존재야 예라야”
“........”
제이는 다른 이라는 단어에 더 힘주어 말했다. 자꾸 현실감 없어지는 친구를 위해, 사실을 제대로 읊어줄 역할은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아, 나도.. 안다구..”
예라의 표정과 목소리는 금세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현실을 살아가야 할 친구를 위해선 이런 태도가 맞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아니까, 걔랑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이왕 같이 살게 된 거, 좀 편하게 지내자고..”
“써”
“......”
“보검이 번호 쓰라고”
예라는 제이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나중에 보검이 일어나면..”
“대신 연애 시작해”
“뭐..?”
“진짜 사람이랑 연애하라고. 너 좋다고 했다며, 그때 그 쌤”
제이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내일 헌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어수선한 등굣길, 얼결에 한 약속이어서 종일 까먹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일 보기로 했는데..”
“진짜? 이 앙큼한 기집애. 잘했네!!”
예라 등짝을 퍽 치며 제이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역시, 그렇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사실은 거절하려고 만나자고..”
“됐다 그럼. 난 간다”
제이는 벤치에서 발딱 일어섰다.
“야! 치사하다 진짜”
“보통 사람들처럼 연애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있으면 내가 신경 안 쓰지. 근데 지금 상태로는 불안해. 정민이랑 둘이 사는 거”
“뭐가 불안해, 니 말대로 걘 사람도 아닌데?!”
“니가 자꾸 그렇게 보질 않으려고 하잖아. 걔한테 빠질까 봐 불안해, 난!”
“........”
단호한 제이의 태도에 예라는 입을 닫았다.
치.. 기집애.. 설마 내가 그 애를 좋아하기라도 할까 봐..
귀신인 그 애를, 설마 사랑하기라도 하겠어..?!
"야 내가 설마 정민이를.."
"너랑 걔는 안돼 예라야. 늦었어. 이미"
아까부터 제이의 말투에서 날카로운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뱉는 말들이 차갑고 시렸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럼 제이의 또 다른 시린 말이 그녀를 떨리게 만들 것 같았다.
예라는 말없이 제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 뒤쪽으로 오피스텔이 보였다.
그리고 나의 집, 그 애가 있을 그곳의 창문이 보였다.
예라는 얼른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그 애를 보면 떨림을 주는 이 시린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다.
따뜻해질 것 같았다. 그 애는 그런 남자니까.
** 분량 문제로 이어지는 연재는 '내 남자가 사는 집. 2'에서 선보이겠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자기 한국에 들어오게 됐어요. 처리할 일들 마치고 다시 적도에 돌아간 후 다음 편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