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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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지난 시각, 예라는 교장실의 호출을 받았다.
광장고에서 처음 실시할 영양 식생활 교육과 상담 일정을 두고 교장, 교감 선생님의 사설이 있을 거라는 귀띔을 조리사 이모님들께 들은 터였다.
예상대로 공적인 내용 말고 막상 면담의 진짜 용건은 따로 있었다.
특별히 신경 써 달라는 것. 당뇨, 고혈압을 달고 사는 나이이니 성장기 학생들 위주로 짜인 식단 말고, 5, 60 대 성인 남성에게 맞는 식단도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말을, 두 분 다 강조하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려지면 특혜니 특권이니 할 수도 있겠으나, 중장년을 위한 식단이 다르게 구성돼야 하는 건 맞는 말이니까.
현미밥을 지을 작은 밥솥을 하나 가져와야겠다고 예라는 생각했다.
그들과 부딪힐 이유는 없었다. 잘 보이려 애쓸 필요도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해주면 그만이다.
교장실을 나온 예라는 상담 일정 안내 공문을 붙이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예라는 각 층의 끝쪽 계단에 하나씩 공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수업 중인 복도는 대체로 조용했다.
학교로 매일 출근하지만 식당과 조리실로 직행하는 일상이라 학교 건물 안 복도에 서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예라가 서 있던 지점에서, 조용한 다른 반에 비해 다소 시끌시끌한 교실이 있었다.
2학년 4반. 예라는 맞은편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통과하며 힐끗 교실을 돌아보았다.
헌규 샘이 수업 중인 교실이었다.
보통 수학 시간이라면 애들 표정은 두 종류인데. 이해하고 집중했거나, 뭔 소린지 몰라 초점이 나갔거나.
근데 이반 애들은 대부분 웃는 얼굴이다. 헌규 샘 설명이 재밌는지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웃고 떠들며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잘하니 선생님이 천직인 사람이구나. 예라는 저도 모르게 헌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 남자가 유난히 눈에 띄는 하루다.
일에 빠진 남자의 모습은 섹시하다고, 제이가 그랬었나..? 출처는 모르겠지만 그 말도 떠올랐다.
즐겁게 일하는 헌규 모습이 꽤 멋져 보였다.
괜찮은 남자인 건, 맞는 것 같았다.
*
도심에 속한 몇 개의 절 중 정민의 활동 구역 내에 있는 곳이 있었다.
병원 내 무수한 이승의 존재들이 무서웠을 때, 적응하지 못한 다른 세계에서의 생활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 정민은 산을 올랐다.
기대 없이 오른 산에는 운 좋게 절이 있었고 정민은 한두 번 그곳을 찾았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던 날은 차마 법당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석가와 그곳을 지키는 여러 신들이 정민을 빤히 내려다보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가늘게 뜬 석가의 눈이 그토록 또렷하고 매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병원에서 언뜻 들은 얘기에 의하면 종종 정민 같은 존재를 알아보는 스님들이 계시다고 했다. 그런 스님을 찾아가 고민을 얘기하고 오거나 부탁을 하고 오는 귀신들도 있다는 소문을, 소문으로 들어 본 정민이었다.
사실 정민이 처음 법당 주변을 배회할 당시, 남다른 스님을 본 적이 있었다.
신자들과 스님들, 등산객이 분주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게 법당을 들락거릴 당시 보통은 정민을 쑥 쑥 뚫고 지나갔다. 되려 그가 사람들을 피해야 했을 때 한 스님이 마치 실례합니다.. 하는 듯한 자세로 정민을 피해 간 적이 있었다.
착각인가 싶었다. 자신이 피한 걸 그렇게 생각했나 싶었다.
돌아본 스님은 뒷모습이었지만 젊에 보였다. 작고 왜소한 체구였고 공손한 모습이었다.
내가 보이냐고 따라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확신도 용기도 없던 때였다.
마음에 복잡한 질문이 이어지는 요즘, 정민은 그 스님이 떠올랐고 그를 만나기 위한 산행을 결심했다.
아무래도 일반인보다는 스님이 낫지 않을까. 매일 불공을 드리고 명상으로 자신을 정비하는 분들이니 해탈에 가까워진 분이 분명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집을 나섰다.
도심에 있는 곳이었지만 수목으로 우거진 산에 오니 상쾌했다.
평일 낮이라 간간이 오가는 등산객들뿐, 한산한 산행이었다.
산을 오르다 보면 한 번씩 지나치는 흉한 모습의 존재들이 있다. 산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산이 좋아 이곳을 거처로 삼은 이들.
무연고자로 죽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제 옷이라도 한 벌 건네주고 싶지만, 정민도 흉측한 모습의 존재들 곁으로는 다가가기 힘들었다. 무서우니까.
그나마 달 기운이 충만한 밤이 아니라서 돌아다니는 존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챙.. 챙.. 어느새 절에 도착했다.
작고 아담한 그곳엔 머리가 맑아지는 풍경 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윽한 그 소리가 산사와 산을 찾은 모든 존재를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정민은 청량한 소리를 귀에 담으며 천천히 법당으로 다가갔다.
모퉁이에 달린 풍경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하늘하늘 움직였고 그때마다 정신을 맑게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물고리를 보고 있자니 마치 최면에 빠질 듯 정신이 몽롱했다.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수행자는 잠을 줄이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지요”
<아....>
그런 의미가 있구나.. 몰랐던 사실을 깨달으며 정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히 전 물고기가 아니고 사람인데 빌어먹을 물고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행을 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랍니다. 홍 홍..”
풍경에 취해있던 정민은 확 깨는 말과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
한 발짝 뒤에 곱상하게 생긴 스님이 편한 미소를 지으며 풍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보이세요?>
“나무아미타불.. 이미 대화까지 나눴으면서 뭘요”
스님은 찡긋 윙크하더니 정민을 향해 합장했다. 정민도 얼떨결에 스님을 따라 합장했다.
'근데.. 이 스님... 여자..?'
“저게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랍니다. 산사라는 곳이 화재에 민감한 곳이다 보니 파수꾼 역할을 한다고도 하지요”
<파수꾼이요?>
“풍경의 물고기는 물인 셈이죠. 화마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물고기가 몸을 흔들며 내는 수신, 즉 물의 신의 풍경소리다.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대화하며 뜯어본 스님의 모습은 그가 기억한 이가 맞는 듯싶었다. 작고 왜소하며 공손해 보였던 그분. 얼굴을 대하고 보니 곱기도 했다.
“전에 오셨었죠?”
<기억하시네요. 그땐 확신이 없어서.. 망자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모든 게 어리둥절했어요>
정민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물며 안내하듯 손을 내밀었다.
“같이 쉘 위 워크나 할까요?”
<네?>
“요즘 짬짬이 영어 공부도 하고 있답니다. 글로벌 시대잖아요. 케이 팝이니 케이 드라마니 하는 마당에 케이 스님도 준비하고 있어야죠. 홍 홍...”
<아 네..>
스님, 맞겠지..? 정민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누가 봐도 모습은 맞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스님은 처음이었다. 신선하달까.. 의심스럽달까.. 하지만 불편하다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예라 이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정민은 앞서 걷기 시작한 스님을 따라 산사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잘 생겨서 기억하지요”
<네?>
“이렇게 멀끔한 망자님은 흔치 않거든요. 홍 홍...”
정민의 눈은 호선으로 휘어졌지만 미소는 어색하게 지어졌다.
'재미있으신 분이네..'
정민은 뒤를 따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 비구니 선재라고 합니다”
<아, 저는 도정민입니다>
비구니, 선재 스님. 화장기 없는 말간 피부와 갈색 눈동자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편한 인상이었다.
“육신도 없이 무슨 고민이 많아 예까지 오셨을까요?”
<이리돼서도 머리 복잡한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정민의 말에 우뚝- 발을 멈춘 선재 스님은 몸을 돌려 정민을 쳐다보았다.
“너무 아프게 물지는 말아 주세요. 홍홍홍...”
앗... 예상치 못한 개그에 당황한 정민은 웃었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제가 요즘 또 옛날 개그에 빠져있어서요. 홍홍홍...”
<아.. 네...>
예라 말고 유일하게 정민을 알아봐 주신 분. 왠지 그 맑은 눈동자가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계실 것 같아 보이는 믿음이 생기면서도 예상을 깨는 말과 행동에 조금 불안하기도 한 정민이었다.
하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맘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디 흔한 일일까. 현재로서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같기는 했다.
자그마한 키의 선재는 종종거리며 다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고, 정민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두 사람이 어느 곳으로 가든 고즈넉한 풍경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