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다

18.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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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가로질러 출근 중인 예라는 오늘도 제이와 통화 중이었다.

[뭐?! 같이 잤다고?!!]

어젯밤 동침 얘기에 제이가 즉각 반응했다.

[하예라 정신 차려! 걔 사람 아니야!]

“알어! 누가 뭐래”

저도 모르게 톤이 올라간 예라를 운동복 차림의 중년 여자가 힐끗 보며 지나쳤다.

[니 눈에 보인다고 자꾸 까먹나 본데, 안 됐지만, 정민이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라구.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으니까”

[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됐고, 나 부탁 하나 할게. 보검이 번호 좀 쓰자”

[...뭐..?!]

제이는 보검의 번호를 지금껏 살려두고 있었다.

처음엔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요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일 년이 이 년이 되고, 이년이 삼 년으로 늘어났다.

오 년째 쓰지 않는 번호의 요금을 납부 중인 제이는 보검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그럴 셈이었다.

그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보검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빌릴게. 잠시만. 나중에 보검이 일어나면..”

[뭐 하려고?]

제이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진지하다거나, 화가 났을 때 나오는 톤이었다.

“정민이 좀 쓰려고. 전화가 안 되니까 불편하네. 터치 정도는 할 수 있어서..”

[야!!]

폰을 통해 들리는 제이의 목소리가 지나가는 사람이 들을 정도로 컸다. 예라는 순간 놀라 걸음을 멈추고 폰을 귀에서 멀리했다.

“야 고막 터지겠다”

[일단 너, 정신 차리고 출근부터 해라. 아침부터 헛소리 그만하고. 끊는다]

“야, 야 유제이!”

제이는 예라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예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기집애.. 왜 이렇게 성질이야..”

제이에게 보검의 전화번호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싶었다.

톡 톡. 누군가 예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돌아보니 헌규였다. 아침부터 기분 좋아 보이는 예의 그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통화하느라”

“그 성격 좋은 친구분?”

“아, 네...”

성격 좋은 애가 맞긴 한데, 오늘 아침은 좀 까칠했다.

“걸어서 출근하세요?”

“집이 근처예요”

“그러셨구나. 전 차가 수리 들어가는 바람에 오랜만에 대중교통 이용했는데, 자주 이렇게 와야겠네요”

“아 예....”

예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헌규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


제이는 사무실에 책상에 핸드폰을 던져둔 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 같이 자..? 참나.. 뭐라는 거야 하예라. 전화번호를 달라고..? 미치겠네 정말..’

예라는 거짓말을 못 하는 친구다. 거짓말은커녕 감정과 생각이 너무 보여 문제인 사람이다. 제이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해리포터 같은 불가능한 상상 말고 라라랜드 같은 현실적인 상상을 선호하는 예라다.

지금 그 애는 상상 속에 빠진 걸까..?

문제가 있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하고 살아야 정상이지, 귀신이랑 사는 게 말이 되는 소리였냐고.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인 게 맞다.

보는 것만 믿고 이성이 앞서는 제이가 정민의 이름을 듣고 놀랐던 건, 그 애의 사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그런 일을 당했으니 잠시 혼이 떠돌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도정민이 어떤 애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막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예라와 함께 오피스텔에서 잤던 날까지도 그랬다. 예라 말대로 그 애가 진짜 거기 있는 것 같았고, 있을 수 있다고 그땐 생각했다.

'나 역시 뭐에 홀렸던 게지..'

집에 돌아와 돌아보니, 주말에 겪은 일들은 그저 예라와 함께 꾼 꿈같이 느껴졌다.

하필 이런 때 알맞게 괜찮은 사람까지 나타나 줬는데, 보이지 않는 존재에 신경이 쏠려있는 예라를 보니 슬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아니야.."

제이는 골똘한 생각에 잠긴 채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 비정상적인 생활을 더는 이어가면 안 되겠다. 친구를 귀신에 홀린 채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자신에게 보검의 전화번호가 어떤 의미인지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예라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보검의 번호를 쓰겠다는 예라의 말이 제이는 서운하고 괘씸했다.

“에이씨”

제이는 미간을 누르고 있던 손을 내리며 의자를 휙 뒤로 돌렸다.

“어... 저 나중에 들어올까요?”

결재 서류를 들고 들어오던 성 팀장이 발을 멈추고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십 분만. 미안”

“넵”

성 팀장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며 연신 제이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기집애..”

입술을 잘근거리며 제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지금 예라의 생활은.


*


예라는 헌규를 만난 공원에서부터 어색한 미소를 입에 물고 나란히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괜히 시간 끌지 말자. 떨리는 게 한 개도 없는 거 맞잖아. 희망 고문시키지 말고 빨리 말해주는 게 이 사람을 위한 배려야'

생각을 끝낸 예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요 샘, 어제 말씀하신...”

“쌤! 안녕하세요~”

교문이 가까워지자 어느새 아이들이 많아졌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확히는 헌규에게 인사했다. 인기가 많은 샘이라 그런가 아는 체하는 애들도 많았다.

“정유미, 오늘은 오른쪽 눈썹이 너무 길다”

헌규의 말에 여학생 몇이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고 떠들며 앞서 나갔다.

“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어제 말씀하신 거요. 생각해 봤는데..”

“내일 퇴근 후에 시간 괜찮으세요?”

헌규의 직진 질문이 또 터졌고 예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쌤, 오늘 왜 걸어오세요?”

친해 보이는 학생 몇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헌규 옆으로 섰다.

“샘도 건강을 위해서 걸어 다닐까 하고”

역시 지금 이곳은 이런 대화가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그래요. 내일 퇴근 후에 봬요 그럼”

차라리 빨리 만나 빨리 대답해 주는 게 맞겠다고 예라는 생각했다.

“어! 쌤, 영양사 쌤이랑 만나실 거예요? 왜요? 왜요?”

둘을 지나쳐 앞섰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물었다.

“질문은 수업시간에만 받는다-”

“야~ 수쌤 내일 영양사 쌤이랑 데이트한대~~”

악--! 안 돼요! 샘 저는요!! 와 두 분 사귀세요~ 교문을 통과하던 아이들 사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들은 입에 물린 수다거리는 순식간에 발도 없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야! 사실을 그렇게 왜곡하면 안 되지. 하샘하고 급식 반찬에 대해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이미 등굣길은 시끄러워졌다. 말을 보태봤자 의심만 괜히 커질 분위기였다.

당황해하는 예라를 보고 헌규는 아이들에게 변명하려는 걸 관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애들 하여간. 하 하..”

“괜찮아요”

어색하게 웃었지만, 예라에게 난처한 분위기이긴 했다.

헌규는 그런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먼저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애들하고 격이 없어서 그런가 확실히 아이들은 헌규를 편해하는 모습이다.

예라는 그런 헌규와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다 학교 건물이 아닌 자신의 공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


예라가 출근한 후 정민은 홀로 집에 남겨졌다.

원래 그랬다. 처음부터 혼자였고, 보통 이렇게 빈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 혼자 남겨진 이곳엔 예라의 물건이 가득했고 그녀의 향기도 아직 남아 있었다.

며칠 사이 달라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책장 위 학사모를 쓴 딸과 함께 계신 예라의 부모님이 보였다.

같은 사고 현장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믿기지 않았다.

그 곱던 딸이 폐인이 될 정도로 슬퍼했다는데, 저분들은 왜 한 번도 나타나 주지 않으셨을까. 혼자 남은 딸에게 나타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귀신을 보는 딸을 만들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근데 예라는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아니, 나는 왜 예라에게 보이는 걸까.. 앞으로 예라는 정말 괜찮을 걸까..? 그날의 사고로 이승의 인연도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린 왜 이런 모습으로 다시 이어진 걸까..

생각이 차고 넘쳤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사실 정민에게는 상상도 못 한 선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예라를 생각하면 아니다 싶은 것도 맞다.

이런 모습으로 평생 그녀와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애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도, 사실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해 주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줄.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줄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정민은 벽시계를 돌아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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