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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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라는 침대 한쪽으로 물러서며 정민을 위한 공간을 내주었다.
얼결에 문 앞까지 들어온 정민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래도 될까..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머릿속이 또 정신없이 엉키고 있었다.
“안 좁지? 나 잠버릇 얌전해”
귀신은 난데, 귀신인 내가 어여쁜 너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도정민. 너 어쩌려는 거야..? 니가 감히, 예라와 한 침대에 눕겠다고..?! 니가 어떤 존재인지 잊은 거야..?!'
머릿속 이성이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정민은 저도 모르게 한발 두발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자. 이제 자자”
예라는 풀썩- 벽에 거의 몸이 닿을 정도의 위치에 몸을 눕혔다.
어서 와 옆에 누우라는 듯 예라는 정민을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옆자리를 토닥거렸다.
“얼른 누워봐. 다리 쭉 뻗고 편하게”
정신 나간 짓이라는 이성의 고함을 외면하며 정민은 천천히 예라 옆에 누웠다.
사람을 홀리는 건 귀신의 짓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귀신을 홀리는 것도, 바로 그 빌어먹을 감정이었다.
정민이 옆에 눕자 예라는 정민이 보이도록 옆으로 누웠다.
이제 정민은 곁눈질만 해도 그녀의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눈동자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미친 심장이 쉴 새 없이 뜀박질을 시작했지만, 막상 숨은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꽃잎 나리던 날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북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정민은 두 손을 꽈악 가슴에 올려놓았다.
“괜찮지? 불편한 거 아니지?”
<으 응...>
'아니, 불편해. 니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숨을 쉬고 있어서, 괜찮지 않고 편하지 않아 예라야'
이토록 그녀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 자자. 월요일이라 오늘 좀 피곤했어”
정민을 바라보던 예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사르륵. 길다란 속눈썹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부드러운 것이 마치 정민의 얼굴을 간질이는 듯했다.
그 정도로 그녀와 가까이 있었다.
“학교 영양사는 식단만 짜는 줄 알았는데..”
예라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할 일이 되게 많다. 교육에 상담에 서류 작성에.. 젤 중요한 건 식단이 아니라 발주더라구. 다음 달 거 입찰하고 계약하고... 아-함-”
예라가 피곤함을 하품으로 쏟아냈다.
<할 일이 많네. 얼른 자라 피곤할 텐데>
정민은 나대는 심장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천장을 올려다본 채 말했다.
하도 한 곳만 쳐다봐서 그곳에 구멍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 학교 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음 달엔 처음으로 식생활 상담도 해야 하고.. 계획서도 작성해야 하고.. 게시해서 신청서도 받아야 하고....”
예라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다 그대로 잠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분명히 잠든 것 같았지만, 정민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가 혹시라도 동그랗게 눈을 뜬 얼굴을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기절하고 말 것 같았다.
정민은 조금 더 그녀의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러다 바라보던 천장에 구멍이 뚫리기 전, 그녀가 내뱉는 숨소리가 더 길고 깊어졌을 즈음, 슬그머니 고개를 움직였다.
그녀에게 닿기 전 창가에 걸린 보름달이 잠시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기울기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달빛은 가득했다.
평소 같으면 빛이 잘 비추는 베란다에서 달빛 샤워를 하며 빵빵하게 기운을 충전했겠지.
하지만 오늘은 얘기가 다르다. 여기서 더 기운을 받았다간 심장이 정말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날엔 그녀의 속눈썹처럼 가늘게 휘어진 여리여리한 초승달이어도 괜찮았는데.. 처음으로 휘영청 보름달이 버거운 밤이었다.
보름달을 지나쳐 마침내 시선이 멈춘 지점에 가녀린 숨결을 내뱉으며 잠이 든 그녀가 있었다.
이렇게 잠들어 있으면 마음껏 실컷 쳐다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정민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침대에서 나란히 누웠다는 사실이 기뻐서인지, 그게 하필 이제라서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본인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새근거리며 잠든 예라 옆에서, 정민은 기쁘고 또 절망적인 감정이 뒤섞여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인연이 되지 않을 걸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이런 존재로 그녀를 만나게 된 상황이 기쁜 일인지 괴로울 뿐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여서 좋았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이렇게..?
짝사랑만 하다 갑자기 죽은 게 불쌍해 이렇게라도 잠시 그녀와의 시간이 허락된 걸까..
그럼 나를 알아보는 그녀는..? 귀신을 보는 예라는 정말 괜찮을 걸까..?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도저히 잠이 들 수 없는 정민이었다.
결국 정민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예라가 몇 차례 뒤척일 때마다 그녀의 팔이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요리조리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자신을 통과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걸 직접 보면서까지 자기 존재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녀가 작게 코를 골았다. 잠든 지 꽤 시간이 지났고 깊게 잠든 그녀를 보니 다소 용기가 났다.
정민은 옆으로 누운 예라를 마주 보고 누웠다.
아기같이 잠든 그녀의 뺨이 발그스름했다. 선홍빛은 역시 그녀와 잘 어울린다. 예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렇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욕구가 치솟았다. 부드러운 그 뺨을 만져보고 싶었다.
아니야. 아니야.. 노골적인 감정을 억제하려 정민은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미친놈..>
만질 수도 없는 사람에게 품는 감정이라니. 죽은 몸이 돼서도 애끓는 욕정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스스로를 욕하고 부정하기를 몇 번. 정민은 다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뭔 일 날 수도 없잖아. 내가 널 만질 수도. 니가 날 만질 수도 없는데’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하긴. 어차피 만질 수도 없잖아. 어차피 그녀를 느낄 수도 없으면서..
저지르지도 못할 욕정을 품고 고민한 자신이 우습고 가소로웠다.
<어차피 만질 수도 없으면서...>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미친. 이렇게 손을 뻗어도 그녀에게 닿지 않을걸.
정민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윽- 그 발간 뺨을 통과해 허공을 가르듯 제 손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역시. 그녀를 만질 수가 없다.
물건을 툭 치거나 움직일 때의 집중력이 지금은 불가능하다. 떨리는 마음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일인지, 내공을 쌓으면 가능할지 그도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큰 소원이 생기고 말았다.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뺨을, 그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소원.
기나긴 밤이 고마우면서도 가혹하다 생각했지만, 어느새 달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글거리며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느낄 수 있었다.
정민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아침 해로 시야가 너무 밝아지기 전, 아직은 고요한 새벽녘의 산책은 정민의 루틴 중 하나였다.
얼마 후면 예라가 맞춰놓은 핸드폰 알람이 울릴 시간이다.
일분일초라도 그녀 옆에 더 있고 싶긴 했지만, 혹여나 잠에서 깬 예라가 눈앞에 있는 귀신을 보고 놀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내가 없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정민은 밤새 갖가지 고민으로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갔다.
*
“아침부터 어딜 갔다 와?”
새벽 산책을 다녀온 정민을 보고 칫솔을 입에 문 예라가 물었다.
<어, 산책 좀>
그가 공원이 코앞이 이 집을 고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부지런하네. 근데 나.. 코 안 골았지?”
예라는 아닐 거라는 답을 이미 정해 놓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었다면 그렇게 뻔뻔한 표정은 짓지 못했을 테니.
<아니. 피곤했는지 잘 자더라>
“그치? 제이 기집애가 그렇게 뻥을 친다니까. 내가 코를 곤다나 뭐라나”
예라는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것 마냥 의기양양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뻥은 아니지만.. 괜찮아 예라야..>
정민은 화장실을 지나쳐 창가로 향하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대답을 하고 피식 미소를 흘렸다.
<상관없어. 시끄러우면 귀를 막으면 되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도 날씨는 화창할 예정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 갔다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복도를 울리는 예라의 발소리가 들리다 사라졌다.
누가 보면 신혼 부분 줄 알겠다.
그나저나 이렇게 매일 밤낮으로 가슴이 두근대다간 심장병에 걸릴 것 같은 정민이었다.
아직 귓가에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이 맴도는 가운데, 또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며칠 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그런 날들의 시작이었다. 정민에게도 예라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