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철들지 않아

16.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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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라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에야 정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민은 눕혀있던 자석 병따개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리며 예라가 물었다.

<응 보검이 병원>

예라의 목소리에 돌아섰던 정민은 샤워를 마친 그녀에게서 수줍게 시선을 거뒀다.

“보검인 좀 어때?”

<곧 일어날 거야. 보검이를 아는 아저씨가 있더라고>

“진짜?”

<나 같은, 아저씨>

“아...”

예라는 소파에 앉아 수건을 꾹꾹 누르며 머리의 물기를 빼기 시작했다.

<깨어날 거야. 그놈이라면>

보검이에겐 어쨌든 기회가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놈이라면.. 이라는 말이 한 가닥 희망도 없는 자신이 처지를 말하는 듯해, 예라는 정민이 안쓰러웠다.

“정민아 나 오늘 웃긴 일 있었다”

예라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누가 나 좋댄다”

<어... 잘됐네..>

정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렇지 못하고 흔들렸던 속마음은 안 들키게 잘 감췄다.

“그때, 병원에서 봤던. 수학샘이라는 사람”

<아...>

역시 그랬다. 그날 예라를 보는 눈빛에서 정민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예라의 미모가 어디 간 건 아니니까.

지척에 저런 여자를 두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근데 나, 너무 아무렇지가 않아”

<... 응..?>

“예전 같으면 그런 말만으로도 괜히 기분 좋아지고, 으쓱해지고 그랬는데, 무감 증에 걸린 것처럼 너무 아무렇지가 않아. 나 진짜 늙었나 봐”

<늙긴. 힘들어서 잠시 소홀했던 거지. 그런 감정에>

“그런가..? 연애 세포들 너무 방치해서 사라졌을지도 몰라”

예라는 일어나 방에서 드라이기를 들고 나왔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철없는 시절의 내가 아니라는 증거 같기도 하고”

<감정은 철들지 않아, 예라야..>

“..........”

나를 봐. 이 지경이 돼서도 너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잖아.

죽어서도 철들지 않는 게, 감정이더라 예라야.. 정민은 그 말들을 눈빛으로밖에 할 수 없었다.

애잔하지만 단호한 정민의 말에 예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가.. 나도 모르겠다~”

위잉-- 예라는 드라이어를 켜고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리를 흩날리며 정민의 말을 골똘히 곱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머리칼이 날리는 예라의 모습을 정민은 오랜만에 본다.

정민은 그날이 떠오르는지 책장에 세워놓은 액자를 바라보았다.

그 사진을 예라가 간직하고 있었다는 뿌듯함에 정민의 입가엔 슬그머니 미소가 달렸다.

“보정 안 하고 막 찍었어도 저렇게 예뻤는데. 그치?”

어느새 예라가 정민의 시선을 쫓더니 입을 열었다. 발딱 일어나 책장으로 간 그녀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우리 참, 해맑았네.. 훗...”

예라는 사진 속 자신과 제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내가 찍어준 거, 알아?>

가까이 다가온 정민이 액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 니가 찍어줬다고..?”

<응. 2학년 봄날>

“헐.. 그랬구나.. 몰랐어 넌 줄. 너였구나...”

예라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그 장면 속에 있었던 정민을 찾아내려 했다.

힘들게 그날을 기억해 내려는 그녀와 달리, 정민의 기억은 정확했고 선명했다.


일 년 전 무다리 고개에서 처음 예라를 만났던 정민은 일 년이 지난 그 봄날에도 여전히 땅만 보며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 잠깐만- 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정민을 멈춰 세웠다. 전교 회장이 된 보검과 함께 부회장으로 학생회를 이끌고 있는 유제이였다.

그녀는 일 년 전처럼 여전히 당당한 표정과 말투였고 이번엔 핸드폰을 들이밀며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

부탁의 말이었지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는 예라 옆으로 뛰어갔다.

허락도 거절도 한마디 못한 정민은 얼결에 제이의 폰을 받아 들고 얼음이 되어버렸고, 벚꽃이 흐드러진 정면엔 두 여학생이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앗. 정민은 얼른 폰을 올려 얼굴 높이에 맞췄다. 얼굴을 가려야 했다.

이미 작년 이맘때쯤 이곳에서 저주가 걸린 상태였다. 눈이 머는 듯했고, 심장은 미친 듯 뛰었고, 분홍빛만 봐도 넋이 나간 모습을 하는 그런 병증을 앓고 있는데, 오늘 증상을 악화시키는 돌발상황에 직면한 셈이었다.

제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빨리 찍으라며 성화였다. 그리고 하나, 둘 숫자를 세는 정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또 성화였다.

정민은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목소리를 냈고 찰칵,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심장박동이 얼마나 컸던지 그 순간 벚꽃 나무에서 우수수 꽃잎이 뿌려졌었다.


“꼭 후반 작업해서 일부러 꽃 뿌리게 한 거 같지?”

예라는 사진을 보여 환상적으로 꽃잎이 날렸던 그날을 떠올렸다.

<사진 많이 흔들렸네>

초점은 맞췄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찍었으니, 저 정도 나온 것도 신기한 정민이었다.

“그래서 더 몽환적이고 예뻐. 살짝 덜 선명해서”

그 말을 하는 예라를 바라보며 정민은 생각했다. 너였으니까 예쁜 거야, 예라야.

“근데 여태 몰랐네. 찍어준 애가 너였다는 거”

예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민을 쳐다보았다.

그때 몰라봐서 미안했고,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마음을 눈빛으로 전하고 있었다.

“지금 보니까 생각나는 것도 같애. 핸드폰으로 얼굴을 가려서 잘 보진 못했는데, 뿔테안경 생각난다. 고맙다 도정민. 예쁜 사진 찍어줘서”

<으..응..>

정민은 예라의 눈빛을 그만 마주 봐야 할 것 같아 어색하게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


“잘 자-”

예라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말투를 길게 끌었다.

<너도. 잘 자>

정민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얼른 문을 닫으라는 시늉을 했다.

딸깍. 예라가 사라진 후, 정민은 소파로 와 몸을 눕혔다.

집은 캄캄했지만, 달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낮은 조명을 켠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는 정민의 두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파 뒷벽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침대가 놓여있다. 오늘도 저 벽 뒤에는 그녀가 있다.

몇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그 애가 있다는 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침대에 누운 예라도 잠이 안 오긴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거실에 정민을 둔 채, 또 혼자 방에 들어왔다.

“자나....?”

예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신경이 쓰이네.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신경도 쓰이고 맘도 쓰이는 예라였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몇 차례 자세를 바꿔보던 예라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이럴 줄 알았어”

크지 않은 소파는 기다란 정민을 간신히 받쳐주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예라에게 놀라 정민이 일어나 앉았다.

“불편하지? 혼자 쓰는 거라 작은 소파 샀거든”

<아니, 딱 좋아>

“침대에서 자자. 혼자 쓰는 거지만 침대는 큰 거야”

<...!... 같이.. 자자고..?>

정민은 천천히 일어서며 제가 들은 말을 되물어 확인했다.

“응. 같이 자자”

잠시 머뭇거리던 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같이.. 자도, 되나..?>

“뭔 일 날 수도 없잖아. 내가 널 만질 수도. 니가 날 만질 수도 없는데..”

말을 맺으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고 말았다.

정민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각성하게 만든 제 말을 예라는 다시 주워 담고 싶었다.

<하긴. 그럴 수는 없지..>

예라는 말 끝을 흐리는 정민의 표정이 안타까웠다. 정민 본인만큼 자신의 존재가 속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가자 정민아. 같이 자자”

정민은 달빛을 받고 선 채였다.

아무리 보름이어도 그렇지.. 달빛에 사람이, 아니 귀신이 이토록 빛나도 되는 걸까..?

달빛과 어울리는 건 역시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구나...

홀린 듯 정민을 바라보며 예라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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