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준

15.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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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일도 관심 없으신가 봐요?”

헌규의 말은 느닷없고 당황스러웠다.

“네..?”

“저 오늘 학교 급식 못 먹었거든요”

“아.. 죄송해요. 오늘 제가 정신이 없어서..”

떠보려는 의도였나 싶어, 예라는 썩 달갑지 않았다.

“일 있어서 밖에서 먹었어요. 하샘 밥 먹고 싶었는데”

“내일 많이 드세요”

“넵. 그때 뵌 친구분도 잘 계시죠?”

제이와 두 사람, 한 쌍의 복식조 같았지.

“어제 봤는데..”

“아, 맞다. 하하. 성격 참 좋으시던데.. 하하”

헌규는 민망함을 호탕한 웃음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저는 그럼, 아직 일이 남아서..”

“하샘, 언제 시간 좀 내주실래요?”

“네..?!”

그에게 예측 가능한 맥락의 질문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걸까.

감이 떨어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예라는 당췌 헌규와의 대화 패턴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느닷없이 말을 던지는 건 정민이도 그랬다.

헌데 묘하게 비슷한 듯 다른 차이를 느끼는 예라였다.

갑자기 시간을 내달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저, 하샘한테 관심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티를 많이 낸 거 같은데, 전혀 눈치를 못 채시는 거 같아서요”

“아...”

안 그래도 며칠 사이 머리에 과부화가 걸릴 정도로 새로운 일이 많았다.

굳이 왜 거기 숟가락을 얹으시려는 건지. 그동안 티를 냈다고..? 왜 전혀 몰랐을까..

예라는 헌규의 갑작스러움이 다소 난감하게 느껴졌다.

“불편하시면 그 친구분이랑 같이 봐도 되구요”

예라의 무반응이 길어지자 헌규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든 상관없습니다. 하샘이 낯을 많이 가리시는 거 같아서 저도 꽤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거든요”

'낯을 가리는 사람이었구나 난..'

“부담 없이 열 번만 만나주세요. 그 안에 제가, 하샘 마음 얻겠습니다”

변화한 모습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제 삼자를 통한 평가를 들으니 그가 알고 있는 모습이 예라 자신에게도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저기, 저는 아직..”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그건 아닙니다”

'내 속이 보이나?'

헌규는 예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그녀의 현재 심정을 말로 옮겼다.

“생뚱맞게 무슨 소린가, 하시는 거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충동적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꺼낸 말은 아니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해요”

“.........”

느닷없는 고백을 받는 건, 사실 예라에게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가 겪는 일상 중 하나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예라에게 들이댔던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지나가는 예쁜 애완견에게 눈길을 보내듯 가볍게 말을 던지는 인간들도 있었고, 세상 모든 고민을 떠 안은 듯한 진지남의 무겁고 버거운 고백까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예라 주변에는 항상 남자라는 인간들이 배회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그들 가운데 예라가 온전히 마음을 주고 시간을 함께한 사람은, 안타깝지만 아직 없었다.

예라의 기준은 단순했다. 가슴 떨리는 상대를 만나는 것.

따지고 재는 일에 서툰 단순녀 예라의 발상에 딱 어울리는 조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 가장 애매하고 어려운 기준이기도 했다.

처음 예라를 떨리게 한 상대는 보검이었지만 의외로 그 콩깍지는 금세 떨어졌다.

그게 가능했던 건, 고2 깜축날 쓰러진 예라를 업고 뛴 얼굴 모를 한 아이 때문이었고.

“대답은 열 번 다 만나고 해주셔도 됩니다”

예라의 잡생각이 길어지자 헌규가 말을 이었다.

광장고에 온 후 그동안 그를 보아왔다. 호탕하고 밝고 긍정적인 그를 지켜보는 동안, 미안하지만 예라의 심장이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적은 아직 없었다.

굳이 열 번을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예라는 생각했다.

“바쁘신데 시간 너무 오래 뺏었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럴 필요가 없겠어요, 라는 말을 막 입에 담으려던 순간이었다.

예라의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헌규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 안 그러고 싶은데.. 휴..”

헌규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예라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관심 있으셨구나.. 죄송하지만 수신이 안 됐네요 선생님”

예라는 체크 목록 장부를 집어 들고 식기류 점검을 마저 끝냈다.

모든 일을 마치고 급식실을 나서던 예라는 멈칫 멈춰서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안 떨리는 거 맞지?”

가슴에 얹었던 손을 볼에도 가져가 보고 이마도 짚어봤다.

역시 이상징후는 없었다.

“어찌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아무래도 저분은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직장 지인 1 정도 될 듯 했다.

관심 가져주신 건 감사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얼굴 없는 그 애를 찾기 전까지, 그 애만큼 예라의 가슴을 뛰게 할 상대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나저나 정민인 온종일 뭐 하고 있으려나...’

업무를 끝낸 예라의 다음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민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연결이 핸드폰으로 가능한 세상에서, 폰이 없는 정민과의 소통은 아무래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서른 평 정도 되는 제이의 사무실에서 세 명의 직원이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 팀장은 가방을 어깨에 메며 사무실 한쪽, 유리로 분리된 제이 집무실로 향했다.

“저희 퇴근합니다”

“다들 수고했어-”

제이는 유리방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인사했다.

성 팀장이 막 문을 닫으려는데-

“성아, 정운 기획 건 미팅 날 언제지?”

“다음 주에 최종 미팅이요. 날짜는 이번 주에 다시 조율하기로 했구요”

“오케이. 조심히 가”

“넵- 오늘도 병원?”

“당연한 걸 뭘 물어”

“저녁은 잘 챙겨 드세요. 낼 봐요 선배-”

성 팀장은 애정 가득한 걱정을 남기고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공사구별 참 칼 같애. 퇴근 시간 지났으니 선배다 이거지? 맹랑한 후배 같으니라고”

제이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흘기고, 퇴근을 위해 책상 위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그녀는 4년 전 전문 리쿠르터 사무실을 차렸다.

회사 인사과에서 일하던 경력도 살리고 보검의 간호를 위해서는 직원보다 대표라는 위치가 조금 더 자유로울 거 같아서였다.

도원고 학생회 후배이기도 한 성 팀장은 제이가 사무실을 차린다는 소식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첫 번째로 합류한 최측근.

직원 중 제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그녀는, 학교 후배인 만큼 보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둘의 연애에 성원을 보내준 후배였다.

드르르륵- 제이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예라였다.

“퇴근하셨구만-”

제이는 기다렸다는 듯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퇴근 준비를 계속했다.

도보로 출퇴근하는 예라는 거의 매일 집에서 나와 공원을 가로지르며, 또 교문을 나와 공원으로 들어서며 제이와 통화를 했다.

“나도 정리 중”

[야 너 혹시 안 쓰는 게임기 같은 거 있어? 태워서 정민이한테 보내주려고]

우뚝.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얼굴로 제이가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제사 지내는 것도, 장례 치르고 물건이나 옷 태우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래. 진짜 젯밥을 먹기도 하고 태워준 옷이나 물건을 쓰기도 하고..]

멈췄던 제이의 손이 다시 움직이긴 했지만 아까처럼 빠릿하진 않았다.

예라는 아무도 모르는 불가사의한 비밀을 혼자만 알게 된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한동안 떠들었다.

[너무 신기하지?]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는 볼게"

제이의 표정은 무표정했고 말투도 단조로웠지만 예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구 나 고백받았다]

“뭐?!”

제이는 하던 일을 딱 멈추고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가 스피커 폰인 걸 깨닫고 얼른 바꿔 다시 귀에 댔다.

“무슨 소리야? 정민이가 고백했다고?!”

[얘가 뭐래. 내가 언제 정민이랬어]

“그치? 아 깜짝이야..”

안도하는 듯 찔리는 듯 제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임헌규 샘. 병원에서 봤던]

“헐 진짜..?!”

벌떡 일어서며 제이는 목소리 톤도 높였다.

“그 잘생긴 그 남자?”

[왜 자꾸 잘생겼대. 하여간 그 사람]

“어쩐지, 그날 딱 촉이 왔다니까. 눈빛이 요상하더라니. 어쩐지..”

예라보다 제이가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요상은 니가 했지. 몰라. 내가 낯을 가리는 거 같아서 조심스러웠대나. 나름 티를 냈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채더래]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내가 다 속상하네”

제이는 일어선 채 마저 정리를 이어갔다.

[전혀 몰랐어. 워낙 여러 사람이랑 친근하게 지내니까..]

“그래서, 뭐랬어?”

[딱 열 번만 만나 달라는 거,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야!!”

날카롭고 뾰족한 고음이 유리벽에 부딪혀 사무실을 울렸다.

[아우 깜짝이야. 말하기 전에 가버렸어]

“그건 그분이 잘했네”

제이는 대표실에서 나가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그 시각 예라는 공원을 가로질러 오피스텔로 향하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 속 제이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타는 듯했다.

“하여간, 이 사람은 아니야. 떨리는 게 한 개도 없어”

[또 또 그 타령. 야, 낼모레면 서른이야! 이제 심장 말고 머리한테 맡기라고]

“딱히 연애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잘살고 있는데 뭐”

[그니까. 이왕 잘 살기 시작한 거, 연애가 첨가되면 완벽해지겠지?]

어느새 예라는 오피스텔이 보이는 위치에 다다랐다.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나..?'

예라는 정민을 떠올리며 딴 생각을 시작했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제이의 따끔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 몰라. 생각 좀 해보고”

[생각할 게 어딨어. 무조건 땡큐지. 괜찮은 사람이라며]

예라는 목을 빼고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직 예라 집 층수가 보이려면 좀 더 다가가야 했다.

[야! 너 뭐 하는데 자꾸 내 말을 씹냐?!]

'보인다. 우리 집'

10층. 저기. 정민이도 사는 집.

“야 미안. 집에 다 왔어. 다시 통화하자”

[야, 너...]

예라는 제이 목소리가 들리는 전화기를 끊고 제 집 창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 보이네..."

일 층부터 다시 한 칸씩 눈을 높였다. 일 층, 이 층, 삼 층….

십층이 맞는데,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정민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 있었으면 내려다보라고 할 텐데..’

안 되겠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귀신도 갖출 건 갖춰야 하겠다.

예라는 공원에서 벗어나 오피스텔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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