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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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일어난 예라를 따라 정민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달 떴어 정민아”
생뚱맞은 말을 뱉으며 예라는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갔다.
그런 예라를 돌아본 정민의 시야에도 아직 제 밝기를 다하지 못한 초저녁 보름달이 보였다.
“보름인가 봐! 와 진짜 동그랗다”
아무 말이라도 뱉어 대화를 환기해야 닭살로 변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라는 창문을 활짝 열고 한 발 더 달에게 다가갔다.
<밤이 깊어질수록 달은 더 환해지잖아>
조용히 예라 옆으로 와서 선 정민이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변이 사라질수록 빛나는 존재여서 외로울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래 보인다.. 달도 사라지는 주변의 것들과 함께하고 싶을 것 같애. 혼자인 건 외로우니까..”
정민은 상념에 잠긴 듯한 예라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은은한 달빛이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선에 부딪히며 그녀만 돋보이는 조명이 되어 주었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넋이 또 나갈 지경이었다. 정민은 그녀에게서 달아난 시선을 공원으로 던졌다.
<근데 달은 왜?>
“니 얘기 더 듣고 있다간 닭이 될 것 같고. 다른 어떤 얘길 꺼내야 할지 머리는 먹통이 됐고. 보이는 건 창문에 걸린 달밖에 없잖아”
피식 미소 짓는 정민의 잇새로 선선한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정민아 너 학교 다닐 때 여자반 쪽으론 안 다녔지?”
<응. 주로 중간 계단으로만>
“어쩐지.. 보검인 학생회 애들 부르러 한 번씩 여자반에 오고 그랬는데.. 넌 통 못 본 거 같애. 멀리서 보검이랑 같이 다니는 거밖에”
<내가 보였어?>
“응?”
<보검이랑 같이 있을 때, 내가 보였다고?>
“당연하지. 어떻게 안 볼 수 있냐. 이렇게 키도 크고 멋있는..”
양심이란 놈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긴 했다. 하지만 예라는 우겨볼 생각이었다.
<나 아니야. 그때 나 안 멋있었거든>
“아니야, 안경이 좀 문제긴 했어도..”
<그때 하예라 눈에는 안보검만 보인다 그랬는데>
“헐- 누가? 내 눈에 씨씨티비라도 달아놨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학년 애들 다 알던데. 니가 보검이 좋아했던 거>
“와, 진짜 모함이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소문이..”
양심이란 놈들이 떼로 몰려왔다. 예라는 더 이상 양심을 찌르는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 소문이 우리 학년 다 아는 비밀이었어>
켁. 할 말을 잃은 예라는 무람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돼? 제이한테만 말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퍼져? 무슨 비밀을 그래?!’
예라 스스로는 도저히 납득 불가였다.
하지만 그 시절 예라는...
보검이 전교 1등 상을 받을 때마다 항상 가장 크게 물개박수를 쳤었다.
교실 옆 복도로 보검이 지나간다고 누가 개미 소리로 입만 뻥긋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고.
보검의 반에 다녀와야 할 심부름은 항상 담임이 묻기도 전에 이미 예라가 가고 있었다.
예라 반 아이들 모두, 안보검에 대한 예라의 지대한 관심을 매일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아이들 입을 타고 옆 반으로, 또 그 옆 반으로, 종이에 물이 번지듯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사실 비밀이 퍼졌다기보다, 허당 미녀 예라만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던 셈이었다.
“참.. 애들은 눈치도 빠르구나..”
더 이상의 우기기는 포기했는지, 예라가 탄식하듯 창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 여자 정말..'
서른이 코앞인 여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눈앞에서 증명하고 있는 그녀를 정민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만난 후로 달아오르고 있는 심장이 폭발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정민은 예라를 두고 창가에서 물러났다.
<나 공원 좀 갔다 올게. 저녁 먹어 예라야>
“공원? 거긴 왜?”
돌아서며 예라가 물었다.
<나 산책하는 거 좋아하거든. 뜨거운 낮 보단 밤이나 새벽, 아니면 지금 같은 저녁에 하는 산책>
“아... 그래. 다녀와”
<나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제대로 먹어. 늦게 올 거니까>
예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문으로 향하는 정민을 바라보았다. 그가 막 문을 통해 나가려는데-
“다음엔 나도 같이 가자. 산책”
멈춰 고개를 돌린 정민이 대답 말고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정민이 나가고 예라는 후딱 저녁을 해결했다.
말한 대로 늦게 올 생각인지 정민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짐 정리를 하는 중간중간 예라는 습관처럼 문을 돌아보았고 어느덧 정리를 대략 마쳤다.
소파를 밟고 올라가 벽시계를 걸고 내려온 예라가 또 문을 돌아봤다.
“열두 시 다 돼가는데.. 이제 와도 돼 정민아..”
시계가 없는 정민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파란만장했던 주말이 끝나면, 내일은 월요일.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을까 열어놓을까 문고리를 잡고 잠시 고민했다.
“뭐야. 닫으나 열어놓나 정민이한텐 아무 의미도 없잖아”
자신에게 자조 섞인 웃음을 보내며 예라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식탁 위 간접 조명만 켜둔 실내는 그닥 어둡지 않았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동거인을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예라 방도 불빛 대신 환한 달빛이 들어차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예라는 침대에 누워 그사이 더 크고 밝아진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잘 자라>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은 예라는 문밖에 선 정민을 바라보았다.
“열두 시 넘기면 안 됨. 중요한 수칙이야”
<안 넘었어>
배게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니 이제 막 열두 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말 귀신같이 딱 맞추네..'
“나 없는데 외출할 때는 표시해 놓고 가기”
<그래. 음...>
거실을 눈으로 훑던 정민의 시선이 냉장고에서 멈췄다.
<저기 붙어있는 자석 병따개. 외출할 때 눕혀놓을게. 가로로>
“콜”
정민의 발상이 깜찍하다는 생각을 하며, 예라는 저도 모르게 깜찍한 표정과 함께 오케이 손가락을 만들어 보였다.
“흠! 나 이제 잔다”
<예라야. 문은 닫고 자. 아직 밤엔 선선해>
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문밖에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민이 조금씩 가려져 사라졌다.
탁. 문이 닫혔다.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섰던 예라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밖에.. 있지? 도정민..?”
시야가 단절되니 순간 답답했다. 다시 문을 열어 확인해야 할까, 하던 그때
<나 있어. 얼른 자 예라야. 잘 자라>
그 목소리에 마음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예라는 침대로 돌아와 누우며 침음을 흘렸다.
“잘 자라..”
보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할 때 정민이 표정이 그려졌다.
"잘 자라.. 잘 자라.."
예라는 이불을 끌어와 얼굴을 덮었다.
이불속에서 정민이를 흉내 내는 예라의 낮은 목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
띠리리링- 띠리리링- 핸드폰 알람 소리에 흠칫한 예라가 손을 뻗어 소리부터 껐다.
꽤 오래전부터 울어댔는지 가장 큰 볼륨으로 울리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예라는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여긴.. 예라는 벌떡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도정민!”
<일어났어?>
정민은 거실 창가에 서 있었다.
“응..!”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렇게 누군가가 함께 있는 건, 오랜만이다.
여기 있다고 답해주는, 거기 그렇게 서 있는 정민이 반가워 예라는 눈곱도 떼지 않은 채 활짝 웃었다.
*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월요일 오전엔 특히 할 일이 많았다.
집무실에서 바쁜 와중에 예라는 제이와 통화 중이었다.
[첫날밤은 어땠어?]
“첫날밤은 무슨”
[혹시 정민이 무서워서 한숨도 못 잔 건 아냐?]
“언제 잠든 줄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는데”
[헉. 곯아떨어지면 안 되는데. 숙면과 코골이 한 세트잖아 너]
“나 오늘 다음 달 식단표랑 보고서 작성해야 하고, 다음 달에 처음 진행할 영양 식생활 교육과 상담 준비해야 한다 친구야”
[정민인 한숨도 못 잤을 거라고 본다 난. 일단, 수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예라는 잠깐 얼음이 됐다.
“안.. 골았겠지..? 아냐. 안 들렸을 거야. 에잇 몰라 나도”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일터에서는 할 일이 우선이니까.
*
폭풍 같은 점심시간이 지났다.
조리사 이모님들은 모두 퇴근했고 예라는 혼자 남아 조리실의 각종 소독고와 세척된 식판과 식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헌규가 식당 쪽에서 조리실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정신이 없어서 점심에 헌규가 왔다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네”
“조리사 이모님들하곤 별문제 없으시죠?”
“아직은요. 모두 좋으신 거 같아요, 여기 분들”
“그쵸? 우리 이모님들이 다 착해요. 그래도 혹시 괜히 텃세 부리거나 하는 사람 있으면 귀띔해 주세요”
“네..”
'빽이 있으신가.. 왜 그런 걸 자기한테 말하래..'
고마웠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근데 하샘은 저한테 일도 관심 없으신가 봐요?”
“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헌규를 예라는 빤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