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극의 결과

13.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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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의도치 않게 귀신과 동거하게 된 예라를 생각하면, 천 번 만 번 이해되는 말이었다.

혈육도 절친도 아닌, 무엇보다 사람도 아닌 존재와 잘 지낼 수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정민은 예라가 하자는 건 뭐든 따르고 싶었다.

“와서 앉아봐, 정민아”

예라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정민을 바라보았다.

'여덟 번째..'

정민은 예라에게 불린 제 이름을 또 하나 가슴에 적립했다.

<내가 어떡할까? 하지 말라는 건 안 할게>

정민도 맞은편에 앉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예라와 얼굴을 맞댄 건 처음인지라 당황한 시선이 자꾸 그녀의 주변만 배회했다.

“니 얘기 좀 들려줘”

어쩔 줄 모르는 정민과는 달리 예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내 얘기..?>

“지금의 네 얘기도 좋고, 과거의 너도 좋고”

<..........>

뭐든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예라는 크고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배회하던 시선이 그 눈빛과 마주쳤다.

덫에 걸린 것처럼, 정민은 좀처럼 그녀의 눈동자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득하고 찌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으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그녀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다.

금세 지나치던 옆모습이어도, 갈색 머리칼을 날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어도 그저 족했던 정민이었다.

가냐른 그녀의 그림자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그였다.

호수 같은 그녀의 눈빛.. 이런 진부한 표현은 질색이었는데.

저 모습을 글로 옮기기엔 그만한 표현이 없구나.. 깨닫는 중이었다.

“질문이 너무 애매했나..? 예를 들어, 뭘 먹기는 해..?”

정민의 정지 상태가 길어지자 예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미안. 어떤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지금 니 생활은 어떤지 궁금해”

내 생활이라.. 정민은 그제야 잡혀있던 시선을 그녀에게서 거뒀다.

<음... 나도 가끔 먹기는 해. 젯밥 같은 거. 절에는 항상 제사가 있더라고>

“와.. 제사 지내는 이유가 있었구나..”

<최근에는 기관이나 시민 단체 같은 데서도 무연고 사망자들을 위한 합동 추모제 같은 걸 지내줘서, 그런 데 가도 되고.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나... 어떡해...?!”

갑자기 놀란 얼굴을 하는 예라의 큰 눈에 빠르게 물기가 찼다.

“나.. 엄마 아빠 제사 제대로 안 지냈어. 나 힘들고, 슬프다고.. 몇 해는 그냥 지나갔는데..”

<괜찮아. 꼭 드셔야 하는 건 아니라..>

의도치 않은 전개에 정민은 짐짓 당황스러웠다.

“어떡해.. 배고팠겠네, 우리 엄마.. 아빠...”

<아니, 안 드셔도 괜찮은데..>

또르르.. 예라의 눈가를 채운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애와 처음 마주 앉아 한 짓이 눈물을 쏟게 만든 거라니. 따뜻하게 손 한번, 어깨 한번 토닥여줄 수도 없는 현실을 따갑게 실감하는 정민이었다.

“근데..”

잠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낸 예라가 제법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으 응..?>

“두 분 같이 가신 게, 나한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 같애. 차라리 함께 계셔서 덜 외로우실 거 같네..”

<.. 아마.. 못 드셔서가 아니라 너 힘들어하는 모습이 더 힘드셨을 거야..>

혼자 새로운 세상에 던져지는 게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일인지 정민은 잘 알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에게만 고통이 남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몸소 경험한 그였다.

“미안. 니 얘기 듣자고 하고선 생뚱맞게..”

<눈물 나게 해서 미안>

사과하는 정민을 보고 예라는 살짝 눈을 접었다.

“첫 번째 수칙 지금 말할래. 앞으로 미안하다는 말 쓰지 않기”

<...아.. 그래..>

“맨날 미안하대. 정작 미안한 일은 한 개도 안 했으면서”

<나는, 나 땜에 니가..>

“됐고, 이제 그 말은 금기어야. 알았지?”

<그래.. 그럴게. 꼭>

정민은 예라에게 다짐하는 자신이 뿌듯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함의 이유였다.

<또.. 봐서 알겠지만, 벽이나 문 같은 거 그냥 통과할 수 있어. 사람도>

“그럼, 나 잘 때도 막 들어올 수 있네..? 문 안 열고..?”

더 중요한 화장실 얘기를 묻고 싶었지만 예라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걱정 마 예라야. 이렇게 됐어도 매너는 여전해..>

정민의 말투는 수줍었지만 진정성이 느껴졌고 덕분에 믿음직했다.

“오케이. 믿어. 도정민”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하는 예라를 보며 정민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본다. 도정민 웃는 얼굴"

빤히 정민과 눈을 마주친 예라의 표정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다시 정민을 홀려버렸다.

<예뻐>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지는 이런 말투를 예라는 낮에도 들었었다.

<우는 것보다, 웃는 게 예뻐, 넌>

“사람은 다.. 웃는 게 예쁘지”

<니가 제일 예뻤어. 그때도, 지금도>

정색하고 담아내는 진심에 예라는 아찔함을 느꼈다.

현재의 정민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낯 뜨거울 수 있는 말을 담백한 돌직구로 뱉을 수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예라와의 간극.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와의 차이가 과거엔 절대 내뱉지 못할 말을 가능하게 한 셈이었다.

비록 그녀를 만질 수도 안아 줄 수도 없는 형태로 만나긴 했지만 변화한 자신이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오늘 밤이, 정민은 지독하게 행복했다.

"무다리 고개 생각나?"

몽롱해지는 안개를 걷어내듯 예라가 화제를 돌렸다.

<당연하지>

“우리 참 이름도 잘 지었어? 황홀한 무다리 고개.. 진짜 예뻤는데..”

예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액자로 향했다.

어떤 사진이 담겨있는지 아는 예라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시사철 다 예뻤어. 봄엔 봄꽃들 피고 여름엔 순 초록이고, 가을이면 분위기 있게 낙엽 쌓이고. 겨울 돼서 눈 쌓이면 그렇게 뽀얄 수가 없었고”

말을 하니 떠오르고, 떠오르니 더 그리운 무다리 고개였다. 사계절 그곳을 누비던 밝고 어렸던 그 시절도.

<거기가 제일 예뻤을 때는, 니가 있었을 때야>

“야 그만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지겠다”

<어, 미..>

미안하단 말을 하려던 정민은 예라의 눈짓에 입을 닫았다.

“이렇게 사람 민망하게 하는 건 미안해야 하는데. 수칙에 허점이 있네”

<미안한 건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 거지, 그 말 때문이 아니야>

꾸밈없고 감성에 충실한 정민의 말은, 마치 거짓말탐지기라는 필터를 거쳐 진실만 걸러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에이씨.. 인간 본성 참..'

순수함을 지닌 상대의 화려하지 않고 직설적인 대사는, 결국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들고 있었다.

콩닥콩닥콩닥.. 아까부터 예라에게 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제 심장의 것인지, 벽시계의 분주한 발 소리를 착각하고 있는 건지, 다만 헷갈릴 뿐이었다.

<너 닮은 벚꽃이 내리던 날, 니가 거기 있었을 때. 그때가 제일 예뻤어 예라야>

결국 예라의 손발이 꽃봉오리처럼 동그랗게 말리고 말았다.

“도정민! 너 진짜, 안 되겠다. 안 되겠어..!”

벙글게 앉아있던 예라가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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