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벌써 일곱 번째

12.

by 타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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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남은 그날이 떠오르는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사와 간호사는 보검에게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를 실행했다.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 보검은 바위처럼 단단해진 몸을 향해 수백 번도 더 달려들어 부딪혔다.

<쉽지 않어. 그랬으면 죽는 사람 하나도 없지>

해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과연 가능할지는 중년남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들리기나 하는지 이분 가량을 보검은 미친 듯 자신의 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세동기의 충격과 그의 돌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찰나- 삑- 삑- 삑- 보검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중년남 눈빛엔 여전히 그날의 놀라움이 차 있었다.

<내가 병원 밥만 칠 년찬 데, 그걸 성공시킨 친구는 처음 봤어. 진짜 응원하네. 워낙 흔한 일은 아니어서 아마 부작용이 있을 거야. 기억을 일부 못 한다던가, 장애가 생기던가. 그래도 깨어날 거라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정민은 속으로 대답했다.

중년남에게 진심이 느껴져 그가 고마웠다.

잠든 듯 누워있지만, 저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보검을 보며 정민은 저릿한 미소를 지었다.


*


예라와 제이는 1층 카페테리아에 있었다.

“정민이도 뭘 먹긴 할까?”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제이가 말했다.

“글쎄, 아는 게 별로 없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근데...”

제이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정민이도 자나..?”

예라도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삐쭉였다.

“안 자는 거면.. 어제 우리 잘 때 슥 들어와 본 거 아냐..?”

“설마..”

예라는 여태 해보지 않았던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근데”

제이가 또 같은 표정을 지으며 탁자로 몸을 밀착시켰다.

“또 뭐?”

“어쨌든 니들 이제 동거하게 된 거잖아..?”

“동거..?”

제이의 말을 되받아치며 예라는 들고 있던 커피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안 보이면 모를까 훤히 서로 보이는데 같이 살면, 동거지!”

제이의 말이 그럴듯했다. 보이고, 들리는 존재인 건 맞으니까.

“동거 수칙이라도 정해야 할 거 같은데”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예라의 두뇌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버젓이 보이는 두 남녀가 같은 집에서 살게 된 거니까. 그렇다고 불쌍한 정민이를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연히 생활 습관도, 패턴도 다를 거고. 넌 사람, 갠 귀신. 제일 문제는 정민이가 아무 때나 아무렇지도 않게 막 통과할 수 있다는 거지”

예라는 순간 떠올랐다. 아까 헌규 샘이 뚫고 지나갔던 정민의 당황한 모습이.

생각해 보니 처음 본 날, 공기 청정기 뒤에서 조용히 하라며 손을 들어 올리던 그때도, 분명 바로 앞에 있던 물건과 부딪힘 없이 그대로 손이 올라갔다.

“너 이제 똥 어떻게 쌀래?”

“...?!..”

원초적이나 정곡을 찌르는 제이의 질문에 예라는 순간 턱 숨이 막혔다.

“변기에 앉아있는데 정민이가 고개 들이밀면 어떡할 거냐고?”

“야 안돼에!”

저도 모르게 예라는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따끔하게 꽂히는 주변의 시선에 둘은 면구스러운 얼굴로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


제이는 병원에서 자겠다며 둘을 먼저 보냈다.

차에 탄 예라는 뒷자리에 정민이 앉은 걸 확인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도로에 올라서자 예라는 마치 여태 숨을 참고 있던 것처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해도 괜찮겠지?"

예라는 백미러로 정민을 보며 말했다.

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지난 5년보다 이틀 동안 겪은 일이 훨씬 더 많은 거 같애>

“나도 몇 년 동안 정신 못 차리고 살았는데, 정신이 아주 번쩍 난다. 도정민 너 만나서”

예라의 입에서 언급된 제 이름 탓인지 정민의 귓불이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뉘앙스가 나쁘지 않다. 너 만나서, 정신이 번쩍 나서, 좋다.. 는 느낌이었다.

<근데.. 아까 그 사람은...>

“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 사람?”

<응. 나 뚫고 간 사람>

"맞다, 너 괜찮았어? 깜짝 놀랐네..”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별일은 없어>

“아.. 같은 학교 샘. 성격 좋은 건 알았는데, 오늘 첨 보는 제이랑 농담 따먹는 거 보고 나도 놀랐네. 헌규 샘도 제이과였나 봐”

'헌규 샘.. 이라는 사람이구나..'

정민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근데 같은 남자가 보기에 그 사람 어때? 잘생겼어?”

<어? 글세.. 뭐 빠지는 얼굴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제대로 보질 못해서>

'응. 남자가 보기에도 건장하고 서글서글한 게 사람 괜찮아 보이더라 예라야'

속마음은 그랬지만 정민은 말로 하지는 않았다. 왠지 솔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여태 그런 생각 못 해봤는데.. 그렇구나..”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예라를 보며 정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산 자에게 질투를 느끼는 자신의 심사가 쪼잔하고 가소로웠다.

“정민아”

예라가 정민의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근데, 니가 더 멋있어. 훨씬”

<..........>

이런 말을 듣고 딱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정민은 알지 못했다.

더구나 예라에게 이런 소릴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상상도 못 해봤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 보여서 모를 거야. 나만 특혜 받았네, 이제 보니까”

'헌규 샘 같은 사람 열 명 모아봐라. 혼자여도 니가 더 빛나지. 바보. 왤키 자신을 모를까..'

예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 말까지 했다간 발갛게 달아오른 정민이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


일어나 병원 다녀온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어느새 일요일 늦은 오후였다.

제이 없이 본격적으로 둘만 남겨진 공간은 꽤나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뭐부터 치워야 하나...”

예라는 눈에 띄는 대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이삿짐이 며칠이나 그대로 놓여있었다.

책 정리를 하다 어지러운 부엌을 보고 싱크대에 그릇을 올리고, 물을 마시려 냉장고를 열었다가 내부 청소를 시작했다.

한마디로 맥락 없이 어수선하게 바쁜 모습이었다.

예라가 왔다 갔다 하는데 정민은 뭐 하나 옮겨주지도 못하고 도와줄 수가 없었다.

예라가 움직일 때마다 그냥 있을 순 없어, 같이 일어나 서성거릴 뿐이었다.

<이삿날엔 원래 짜장면인데>

“저녁에 짜장면 먹을까?”

예라는 말을 끝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미친. 뭐라는 거야. 예라는 제 입을 톡 때리고 손으로 덮었다.

<너 먹어. 전화번호는 알아?>

“제이가 알려준 집이 있긴 해..”

속이 허하긴 했다. 그렇다고 말도 허하게 나올 줄은.

“정민아”

예라가 또 정민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벌써 일곱 번째. 정민은 아침부터 그걸 차곡차곡 세고 있었다.

아무리 수가 커진다 해도 헷갈리지 않고 셀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얘기..?>

“어쨌든 같이 살게 됐으니까.. 동거.. 잖아..?”

'어... 말이 그렇게 되나...??'

정민은 ‘동거’란 말이 주는 뉘앙스에 괜히 새침해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내 집이기도 하고, 니 집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나도 고르고 고른 집이긴 해. 너처럼 돈은 안 들었지만,,>

“동거 수칙을 정하자. 함께 잘 지내려면”

오늘 예라의 말은 내뱉는 족족 정민의 가슴을 일렁이게 했다.

'잘, 지내려면..'

예라는 잘 지내보기 위해 대화를 하자며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민의 심장이 또 허락도 없이 달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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