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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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샘을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예라 앞으로 성큼 다가온 헌규는 기쁘게 놀란 표정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예라를 보며 제이는 누구냐고 눈짓했다.
“같은 학교 다니는 선생입니다. 친구분...?”
성격 좋은 헌규는 처음 보는 제이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넉살 좋은 제이는 그걸 또 넙쭉 받아쳤다.
“와.. 근데 두 분. 너무하시네요”
헌규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희가 뭘..”
밑도 끝도 없는 헌규의 말에 예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심하게 아름다워서 죄송합니다-”
제이 대답에 예라는 희번덕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와.. 친구분, 천재세요?”
초면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예라는 허걱하며 칼 같은 눈빛을 제이에게 꽂았다.
묻는 헌규 샘이나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하는 친구나, 환상의 복식조가 따로 없었다.
“와.. 우리 하 샘한테 이런 친구분이.. 본인만 화려하게 다니지 마시고 우리 하샘도 신경 좀 써 주세요. 너무 안 꾸미셔서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
대꾸하려 호흡을 들이마시는 제이를 앞서 예라는 얼른 말을 가로챘다.
“저희는 가볼게요. 일 보고 가세요"
예라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제이 손목을 잡아끌고 잰걸음을 걸었다.
“넵! 월요일 점심에 봐요 하샘. 친구분도 반가웠습니다”
헌규는 마치 점심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을 맺었다.
점심때 보는 게 맞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착각할 수도 있겠다고 예라는 생각했다.
“저두요. 안녕히 가세요~”
제이는 고개를 돌려 호감 가득한 눈빛을 하고 헌규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이의 인사에 화답하고 돌아선 헌규는 멀뚱히 서 있던 정민과 부딪혔다. 아니, 지나쳤다.
<윽- >
'나 인간 통과하는 느낌 별론데..'
예라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헌규가 지나쳐 가고, 살짝 당황해하는 정민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넋이 나간 존재라 그런지, 정민은 더 자주 멍을 때리곤 했다.
예라와 아는 사람이라는 남자를 쳐다보다 또 멍을 때렸다. 그러다 통과당했고.
괜찮냐는 듯 바라보는 예라에게 정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헌규는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한 번 더 돌아서 인사를 하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누구야? 아주 괜찮네”
헌규가 보이지 않자 제이는 예라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2학년 수학 샘. 사람 괜찮아. 밝고 활기차고”
“야 괜찮은 게 아니라 수준급인데? 외관도 번듯하고”
“그래..? 그렇구나..”
예라는 아주 성의 없게 대답했다.
“헐.. 그거 왕년에 자주 보이던 건방진 태돈데. 그때야 너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때고. 야, 절친으로 한마디만 하자. 너 상태가 많이 달라진 건 알지?”
제이는 눈을 부릅뜨고 예라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알어 알어! 근데 난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아. 아픈 만큼 성숙도 했고”
치.. 가시나. 말 안 해도 아는 사실을 그렇게 콕콕 찔러대냐. 알지. 왜 모르겠냐. 5년을 그렇게 폐인처럼 살았는데.. 49일 지나기 전에 엄마 아빠 한번 보겠다고 요단강, 삼도천 거의 근처까지 가봤는데..
성의 있는 예라의 대답은 그냥 속으로 삼켜졌다.
*
“자기야 나왔어-”
제이는 보검의 병실로 들어서며 다른 환자 가족들과 익숙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보검은 바이탈을 체크하는 장비를 연결한 채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안보검... 나 왔다...>
어느새 뒤따라온 정민은 보검의 침대로 다가섰다.
“나도 오랜만이지? 자주 못 와서 미안..”
오랜만에 병원을 찾은 예라도 보검에게 인사했다.
“아 증말.. 오늘 또 존멋 갱신이네. 이러니 내가 안 올 수가 있어. 하루라도 안 보면 눈이 썩는데”
제이의 말에 병실 환자와 가족들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오글거리는 그 말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너무 들어 무뎌졌거나.
“안 되겠다. 간만에 뽀뽀 좀 해야겠다. 시력 보호를 위해 커튼은 칠게요~ 청각 예민하신 분들은 알아서 티비 볼륨 업 해주세요. 어차피 얘 있어서 찐하게도 못해요~”
“하. 하. 하..”
제이의 넉살에 민망의 몫을 차지한 예라는 얼굴 근육 중 간신히 하관만 움직여 미소 지었다.
참하게 차려입고 곱상한 모습으로, 넌 참 별소리도 잘하는구나 유제이. 예라의 어금니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보검의 침대 주위로 커튼이 쳐졌다. 네 친구가 모인 공간이 한결 아늑해졌다.
“보검아. 특별한 친구가 왔어. 누군지 알아보겠어?”
제이는 보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때 쑤욱- 궁금증 많은 한 남자 귀신이 커튼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정민과 눈이 마주쳤다.
<못하는 거 구경 좀 할랬더니 더 잽싼 놈이 있었네...>
그 순하던 정민이 눈에 빡 힘을 주고 인상을 썼다.
<꺼져라...>
<새끼 밝히기는.. 쳇!>
정민의 모습과 말투에 예라는 놀랐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 귀신이 사라지자, 정민은 예라에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 한 번씩 이렇게 굴어야 할 때가 생겨.. 놀랬지..?>
“나 그저께 봤잖아. 괜찮아”
예라를 향해 잔뜩 인상을 구겼던 자신이 떠오르자 정민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예라가 놀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개 멋있다는 생각을 번개처럼 떠올렸던 자신을 인지해서였다.
세상 순둥인 줄 알았던 정민의 이런 성깔 있는 모습은 무섭기보다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원래 내가 나쁜 남자 스타일에 끌렸었잖아.. 그래서 한때 냉혈인간 같은 보검이한테도.. 아냐아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 예라를 정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이는 정민이 서 있을 법한 곳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 와봐. 둘이도 할 얘기 많을 거 같은데”
<할 얘기. 많지..>
정민은 제이 맞은편 머리맡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병원이 아니라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는데.. 그 팔팔하고 똑똑하던 놈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나는 어쩌자고 이런 존재가 된 건지.. 정민은 가슴이 빡빡해지는 기분이었다. 눈가도 시렸다.
“제이야 미안..”
예라가 불쑥 제이에게 말했다.
“나 힘든 것만 알았지 너랑 보검이를 너무 신경 못 썼어..”
“너 우리 보검이 아직도 좋아하니?”
“야!”
“아니면 미안할 거 없다. 인제 일어날 거니까”
그 말을 하는 제이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일 년 전에도, 그리고 내일도, 제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금방 일어날 거라고. 언제 눈 뜰지 모르는 남친을 위해 항상 대기 중인 그녀였으니까.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올게 회포 풀고 있어"
정민에게 시간을 양보하려 제이는 예라와 함께 자리를 비워주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정민은 보검 옆에 서서 가만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뭐하냐.. 안 일어나고..>
정민은 보검의 손을 잡아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깨어나라 안보검.. 넌 할 수 있잖아..>
<그 사람 끈질기더구먼>
낯선 목소리에 돌아보니,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커튼 안으로 몸을 반만 통과시킨 채 서 있었다.
<나도 이 병실에 있다 끝났거든>
웬만하면 저승의 존재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 했는데. 정민이 거부할 새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여깄 다가 죽어서 그런가, 집보다 더 익숙해. 병원 냄새도 좋고>
그는 완전히 커튼 안으로 들어섰다. 말투와 인상이 나쁜 사람, 아니 나쁜 귀신같지는 않았다.
<작년인가.. 그땐 진짜 갈 것 같았는데, 아직 넘어올 때가 안 됐던 건지>
<아직 죽으면 안 되는 친구예요.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놈이에요>
<아깝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어. 누구나 다 안타깝고 소중한 생명이지. 친구?>
정민에게 시선을 던지는 중년 남자와 그제야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
나이를 가늠할 수 있게 패인 주름과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처진 눈매가 선한 인상을 풍겼다.
<네. 제 친구가 돼 준 얘에요>
<한번 얘기 나눠 봤지. 대화랄 것도 없었지만>
<얘가 죽었었어요..?!>
정민은 저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작년에. 넋이 한 반쯤.. 분리됐었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는데,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하더라고. 내가 저쪽에 있다가 다가왔어. 드디어 이 세계로 넘어오는구나.. 싶어서>
<........>
<내가 산 사람인 줄 알았나 봐. 의사, 간호사가 나를 훅훅 뚫고 뛰어 오니까, 그걸 보더니 소리를 지르더라고>
'안다. 그 기분.. 깨어난 내가, 원래의 내가 아닌 다른 의식의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기분. 뒤통수에 섬광이 터지는 벼락을 맞은 채, 지진에 쓰나미까지 덮여오는 듯한 그 기분..'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혼을 냈어. 완전히 분리된 게 아니니까 시간이 좀 있었거든. 소리 지르지 말고 할 수 있으면 빨리 몸으로 들어가라고 했지>
<잘 안 되잖아요. 전 수백 번 튕겨 나가던데..>
<보통은 놀라서 시간을 다 놓쳐버리니까. 아주 영리한 친구더라고. 아직 하반신은 분리되지 않은 걸 보더니, 죽어라고 제 몸으로 다시 몸을 던졌어>
정민은 보검을 내려다보았다.
사투를 벌였구나.
다시 살기 위해.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