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를 마치고 고랩을 기다리다
관객 하나 없이 사상 초유의 펜데믹 상황에서 치러진 <쇼미 더 머니 9>이 얼마 전 막을 내렸다.
나의 원픽이었던 릴보이와 원슈 타인은 우승자와 탈락자로 나뉘었지만
이름을 알리는 데에는 둘 다 성공한 듯싶다.
난 40대 후반의 중년 아줌마다.
그런데 난 매주 금요일 밤이면 중딩 고딩, 아들 딸과 나란히 앉아
조마조마해하며, 들썩거리며, 목을 까딱까딱해가며 쇼미를 시청했다.
왜?
고등 래퍼 시즌 2를 기점으로 힙합에 슬쩍 발을 들여놓은 힙 한 아줌마니까.
고랩 시즌 2가 진행될 당시, 한동안 입에 "하온이"를 달고 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인니의 우리 집엔 실시간 티브이 시청 시설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프로그램이 끝나고 몇 시간 뒤 올라오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한국 티브이를 시청한다.
한국 시간 11시 정도에 시작하고 자정이 넘어 끝나는 프로그램이라
2시간 늦은 시차의 이곳에서도 거의 11:30은 돼야 시청이 가능했다.
금요일 밤이라 부담은 없긴 했지만
간혹 아이들이 시험 기간이거나 다른 일로 못 보게 되는 날이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엄마 혼자 보지 마. 알았지? 내일 아침에 같이 봐. 꼭!"
알았어 알았어 얼른 들어가 공부하라고 하고는
조용히 안방으로 아이패드를 챙겨 들어가 시끄럽다는 남편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 화려했던 고랩 2를 시청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방송을 켜는 아이들과 함께
또다시, 처음 보는 냥 시청을 하곤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의리 없이 먼저 봤다는 게 들통나긴 했지만...
당시 '김하온'이라는 센세이션 한 이 아이는 40대 중반 아줌마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랩이라는 걸, 힙합이라는 장르를 한 번도 제대로 들어 본 적 없고
솔직히, 알아듣기 힘든 애들 음악이라는 생각에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그 장벽을
말끔히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명상 운운하며 주변의 비웃음과 함께 시작한 첫 싸이퍼 무대에서의 충격은,
지금도 가끔 다시 볼 때마다 역시!라는 감탄을 내뱉게 한다.
"안녕 날 소개하지 이름은 김하온 직업은 트래블러 취미는...."
난 한동안 중딩 아들에게 하온이 처럼 자기를 소개해 보라고 자꾸만 시켰고
날렵하지 않은 발음을 가진 중딩 아들은 나름 자신만의 라임에 맞춰 랩을 내뱉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이 김하온과 비슷한 거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물론 그럴 때마다 현실성 이백 프로의 팩폭을 날리는 누나에게
너덜너덜하게 공격당하곤 했다.
무튼, 시대의 명곡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코드'를 비롯해 무수한 화제성과
좋은 곡들을 남기고 그렇게 시즌이 끝이 났다.
이후 이 중년 아줌마는 애들보다 먼저
고랩 시즌 3의 소식이나 쇼미 새 시즌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며 손꼽아 기다렸고,
이후, 생각보다 성공하지 못한 두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뭔가 마셨으나 아직 갈증이 풀리지 않은 그런 찝찝함을 품은 채 쇼미 9을 맞이했다.
사실 다른 방송 프로그램도 대부분 많은 영향이 있겠지만
특히 음악 방송, 특히 또 힙합 방송에서 관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중요하다.
같이 소리치고 구르고 뛰어주는 관객이 없는데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말이 안 되는 그림이다.
걱정과 기대를 안고 시작한 이번 시즌은, 하지만 실력을 갖춘 래퍼들의
실력에 기반한 탄탄한 음악이 더해져
(열광하는 관객과 함께였다면 열 배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성공적인 시즌이 되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생긴 능력? 같은 게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다는 점.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대충 어떤 사람이겠거니.. 여겨지고
대부분 더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안목이 맞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능력은 쇼미나 고랩을 볼 때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딱 첫 회를 보고 "쟤 괜찮네" "얘 잘한다" 찍은 출연자들은 거의 결승전에서 볼 수 있었다.
고랩 당시엔 그저 힙합 보는 엄마를 신기해하던 큰 딸도
점점 엄마의 안목을 인정해주고 신뢰(?)하게 되었다.
나란히 앉아 시청하면서 내뱉는 엄마의 멘트를
잠시 후 노래가 끝나고 어느 멘토가 똑같이 하는 경우를 몇 번 겪고나더니
"엄마가 이제 멘토해도 되겠다"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씨익-)
쇼미 9이 끝난 지금, 금요일 밤이 너무 널널해 졌다.
고랩 새 시즌 촬영이 시작됐다니, 당분간은 목 빼고 기다리는 수밖에.
헌데 이번 시즌은 특히나 특별한 시청이 될 듯하다.
왜냐, 내 친구의 아들이 출연한다는 가슴 뛰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통해 박재범이 영입했다는 한 고딩 래퍼에 대해 알고 있던 아이들은
"걔가 엄마 친구 아들이야~"라는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깜짝 놀랄만한 내용을 알게 된 날, 기분이 묘했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긴 했구나.. 나의 지인들이, 친구 중 누가가 아니라
이제 나의, 우리의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게 되는 그런 나이가 된 거구나..
한편으로는 씁쓸했지만, 그만큼 또 기대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친구와는 사실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었다.
아들 소식이 계기가 되어 다시 연락하게 된 30년도 더 지난 중학교 친구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고등 동창을 통해, 그 친구가 주변에 내 연락처를 물어보고 다닌 다는 얘길 들었고
몇 명의 징검다리 친구들을 통한 후 연락이 닿아
중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됐었다.
세상 즐겁기만 했던 여중생 둘이 어느새 중년의 모습이 되어 만나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며, 생각지도 못한 수술 얘기들을 나눴었다.
당시엔 그 친구가 폐암 수술을 받고 몇 년이 지난 상태였는데
최근 아들 소식 때문에 오랜만에 통화할 때에는
이년 전 받은 나의 유방암 소식이 우리의 뉴스거리가 되었다.
나이가 드니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내 친구 아들의 기쁜 소식이, 마치 내 새끼의 어떤 소식 인양 느껴진다는 거다.
이 나이가 되지 않았다면,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아마 모르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문자투표는 못 해주겠지만
매주 열렬히 시청하며 열렬한 응원을 보낼 것이다.
멘토 버금가는 냉정한 평가를 친구 아들에게까지 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고랩 시즌4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