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된 재킷

아직은, 입을만한

by 타프씨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들이 있다.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나이가 되고 나니, 더 그렇다.


엄마. 아빠. 부모.

하고 싶은 말보다 찌릿한 감정이 먼저 앞서

다시 접어 넣어 두곤 한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 드라마가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일일극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걸 점점 더 깨닫는 중이다.



한때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시작하던 시절,

난 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인생이 싫었다.

볼품없다 생각했다.

크게 찌들지도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았던

지극히 평범했던 가정환경이, 난 좀 불만이었다.


살림하는 엄마와 택시를 운전하는 아빠. 그리고 삼 남매.

낙천적인 성격의 아빠는 술을 좋아했고

그렇게 아빠가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날엔 엄마는 팔짱을 끼고 서 계셨다.

안방이 아닌 마루에 뻗어버린 아빠를 담당하는 건

애교라는 기술을 가진 막내의 일이었다.

가느러 진 엄마의 눈초리에 나는 당연한 일인 양 아빠를 구슬려 안방으로 이끄는 일을 하곤 했다.


오빠 언니도 꽤 온순한 성격들이라

자라며 머리끄덩이 한번 잡고 싸운 적이 없다.

꽤 순종적이었던 오빠와 언니와 달리 막내가 한 번씩 골 때리는 일을 벌이긴 했지만

집안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큰 사고 친 적 없이 성장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 집에선 암이 흔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외할머니부터 엄마까지 강력한 유전요인으로 이어진 유방암 내력은

언니를 거쳐 나에게까지 나타났고

아빠는 황당하게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들었음직한 백혈병 판정을 받으셨다.

전화를 받았을 당시엔 '백혈병'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이름에 놀라 잠시 머리가 하얘졌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빠는 급성이 아닌 만성이었고

다행히 약으로 치료, 유지가 가능한 그런 병이라 했다.


이 정도면 평범한 일일극 내용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이제 각자 정성껏 건강들 유지하고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엄마 아빠만 조심한다면야,

평범했지만 돌아보면 나름 우여곡절 많았던 엄마 아빠의 인생도

이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다.



구강암 4기.

이제까지 우리 가족이 겪었던 수술 중 가장 큰 수술을

작년 말, 77세의 아빠가 받게 되셨다.

이비인후과, 치과, 성형외과.. 몇 분야의 의료진이 함께 참여한 큰 수술 후

이제 원래 아빠의 얼굴은 남겨진 사진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얼굴 반쪽에 걸쳐 크게 남은 흉터 자국과 사라진 입천장 때문에

한동안은 음식을 먹지도 물을 삼키지도 못하셨고

말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힘든 수술을 마치고 한 달여 만에 집에 돌아오신 아빠는

근 사십여 년을 몸 담았던 택시를 파셨다.

개인택시 번호판을 넘기러 나가시던 날,

엄마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많이 우셨다.

그동안 소소한 접촉사고에도, 백혈병 판정에도 꿋꿋하게 이어오던

아빠의 평생 직업을

이제 더 이상을 물러날 데가 없어, 병에 떠밀려, 이런 몸으로 그만두게 되었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고 하셨다.


언니는 주말에 아빠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고 한다.

회사 같았으면 거창하진 않아도 박수라도 받는 은퇴식이 있었겠지만

아빠의 은퇴식은 평생 아빠가 해온 노동과 노력과 결과에 비해

너무 의미 없이 끝나는 거 같아 아쉬웠다고 했다.

꽃을 받은 아빠는 고맙다며,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빠의 옷 서랍엔 25년 된 재킷이 있다.

평생 직업의 반 이상을 함께 한 이 운전복을 아빠는 그렇게 버리지 못하셨다.

작년 여름 한국에서, 이 골동품 같은 아빠의 운전복을 보고

살짝 짜증이 났었다. 궁상떠는 거 같아서 한 소리 했다.


"아니 이걸 아직도 입어? 안에도 다 헤지고, 그만 버려"

"아직 입을 만 해~ 그 옷만큼 편한 게 없어. 오래돼서 부들부들하고..."


운전대를 놓게 되신 지금, 이제 더 이상 그 골동품을 입을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아마, 아직 버리진 못하셨을 게다.

버리기에는 아직 입을만할 테니까..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고 계신 아빠의 목소리도

차츰 평소의 톤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평범했고 또 파란만장했던 아빠의 인생도

아직은, 살아가실만한 것 같다는 안도감에

오늘도 또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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