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kelahiran(끄라히란)

by 타프씨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 아빠는 안방에서 뭔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셨다.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들 하나 있는 집인데.."

"그러게... 내일 한의원부터 가봐"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비실비실한 체형에 한 번씩 거사까지 치르는 모자란 딸이 아이를 못 나을 거라 생각하셨다고 한다. 귀한 집 대를 끊어 놓지는 않을까, 그런 딸을 보내는 게 죄를 짓는 거 같으셨단다.

생리 불순에 거창한 생리통, 사실 난 3년 정도 생리가 끊긴 적도 있었다. 그동안은 그 악마를 만나지 않아 난 너무 행복했지만, 막상 결혼이라는 걸 하기로 마음먹으니 나의 그 모든 전적들이 좀 걱정되기는 했다.

이 모지란 딸의 부모도 막상 사돈 될 분들을 만나고 오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셨던 게다.


남편과 나는 31살 동갑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여자 31살은 빠르지 않은 나이였고, 남자 31살은 늦지 않은 나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손만 잡아도 임신이 되는 반전 체질의 소유자였다.

그토록 불규칙했고 날 아프게도 했던 내 여성 호르몬은, 임신 출산에 관해서는 아주 관대했다.

1월 초 결혼한 나에게 10월 말 첫 아이를 안겨줬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임산부가 되면, 8개월쯤 한국으로 날아가 출산과 산후조리를 마치고 백일쯤 아이와 함께 돌아오거나, 그냥 남편이 있는 이곳 현지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애를 낳을 당시만 해도 한국으로 들어가 아이를 낳고 나오는 경우를 더 많이 선택하던 시절이었다.

이곳 의료에 대한 믿음도 없거니와 한국에만 있는 산모를 위한 특급 시설도, 출산 때가 되면 갑자기 더 생각나는 엄마도 없기 때문에, 남편과 헤어져 한국행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왕복 비행기 값보다 비싼 병원비를 생각하면, 맘 편하고 익숙하고 안전한 내 나라 병원만 한 데는 없다.


남편은 어느 쪽이든 내가 편한 쪽으로 선택하라 했지만, 이곳 병원도 나쁘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는 사장 사모도 어느 병원에서 출산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며 은근히 사심을 내비쳤다.


두 경우 다 장단점은 있었다.

한국 행은, 임신 말의 무겁고 부푼 배를 안고, 또 출산 후 백일 남짓한 핏덩이를 안고 비행기를 타고 내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현지 행은 남편 혼자 두지 않고 함께 출산을 맞이할 수는 있지만 비싼 병원비와 출산 후 산후조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고민을 해야 했다.


난 이곳에서의 출산을 선택했고, 막내딸 산후조리를 빌미로 부모님의 첫 해외여행을 기획했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 한 상황이라 일 년도 안돼서 다시 한국에 나가야 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 후 살게 된 '내 집'에서 아이를 낳고 싶기도 했다.

돌아보면 무지해서 용감했다. 아마 인니에 몇 년 살았었고 이곳에 대해 좀 더 많이 알던 상태였다면, 고민 없이 한국행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비싼 병원비를 제외하면 이곳의 산부인과 시스템은 한국에 비해 크게 나쁘지 않았다.

난 두 아이를 다 이곳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지만, 한국에서 큰 애를 낳고 둘째를 함께 이곳 병원에서 출산한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곳 산부인과는 꽤 괜찮다고 한다.

10월엔 마침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도 있었다.

예정일을 기준으로 2주 정도 일찍 도착해 딸내미 사는 곳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으러 다니다가, 출산 후 일주일 정도 엄마의 산후조리를 받고, 피곤하실 즈음 발리로 결혼 기념 여행을 보내드리자는 나름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은 처음 여권을 만드시고 막내딸이 사는 이 뜨거운 곳에 오기 위해 7시간 넘게 날아야 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으셨다.



엄마 아빠를 픽업하러 공항에 나가는데 마음이 콩당콩당 뛰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이 '내 집'이었는데, 다른 '내 집'으로 엄마 아빠를 초대한 게 어색하고 이상했다.

남편은 공항 직원에게 팁을 찔러주고 비행기에서 승객이 나오는 지점까지 픽업을 갔다. (요즘엔 이런 경우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한참을 출구에서 기다리던 내 앞에 어리둥절한 표정에 벌써 이마가 촉촉해진 엄마 아빠가 나타났다.

만나는 순간부터 차로 오는 내내 열 달 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들려드리느라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평생 택시를 운전하신 아빠는 직업병처럼 도로와 지나다니는 차들에 관심을 보이셨다.


그렇게 밤길을 달려 거의 12시 다 된 시간에 집에 도착했고, 바리바리 싸온 짐을 풀고 정리하고 씻고 나니 거의 새벽 1시가 돼서야 주무시라는 인사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잘 오시려나 종일 걱정이었던 만삭의 나도, 퇴근하고 돌아와 부랴부랴 저녁 먹고 공항으로 향했던 남편도, 둘 다 피곤했다. 옆방에 엄마 아빠가 있다는 즐거운 사실을 떠올리며 신나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한 시간쯤 잠이 들었다 깼다.

배가 아팠다.

조금 있으니 또 괜찮아졌다가 또 아파왔다.

사실 배가 아팠던 건 공항 픽업을 가기 전 몰에서 저녁을 먹을 때부터였다. 그때도 잠깐 배가 아팠는데, 금방 또 괜찮아지니 그냥 넘어갔었다.

진통이었다.

공항 가는 내내,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만나 집으로 오던 내내, 난 이 삼십 분 간격의 진통을 하고 있었다.

워낙 평소에 극심한 고통에 단련된 몸이다 보니, 그 정도쯤은 나에게 별 통증도 아니었다.

공항에서 오는 동안 몇 차례 통증을 느꼈던 거 같긴 한데, 신난 마음에 밀려 전혀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리고 비로소, 잠자리에 누워서야 진통을 느끼게 된 거다.


피곤에 절어 코 골며 잠든 남편을 바로 깨울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그런 진통 후 얼마나 더 지나야 애가 나오는 건지도 몰랐다.

아까처럼 아프다 괜찮아지려나... 참기를 한 시간..

새벽 세시가 돼서야 진통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5분 내외였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남편을 깨웠다.


"자기야.. 자기야.."

".... 어 어 왜...?"

"나 진통 오는 거 같애"

"... 뭐...?"

"병원 가야 될 거 같은데..."


부모님이 깨실까 조심스레 집을 나온 우리는 캄캄한 새벽 도로를 달려 병원으로 향했다.

두 시간 정도 잠이 들었던 남편은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없어 보였다.

남편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잠도 덜 깼고 이러다 진짜 애가 나오는 건 아닌가 당황스러운데 옆 자리엔 진통하는 와이프가 있었으니, 충분히 멘붕이 올만했다.

매번 다니던 병원 길인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당황한 남편은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팁을 쥐어주고 다니던 병원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고, 그 택시를 앞세워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


현지 직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다녔던 곳은 소아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었다. 꽤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병원으로 Bunda 라는 병원 이름을 딴 분유도 슈퍼에서 팔 정도였다.

그만큼 건물도 오래됐고, 간호사와 의사 대다수가 지긋한 연령대를 보이는 곳이었다.

처음 아이를 낳는 철없는 신혼부부는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그런 우리 모습과는 백팔십도 다르게 지긋하고 넉넉한 체형의 간호사 아줌마들은 누구 하나 다급해하지도 않았고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산모를 맞이했다.

당시엔 내 인니어 실력이 바닥이었던 상태라 간호사가 와서 묻고 시키는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 해야 했다.

당장 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출산은 내 생각처럼 단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사전 준비를 해야 할 것도 많았고 아이가 나올 시간까지 고통을 참으며 기다려야 했다.

산고의 고통이라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러 집으로 갔다.

간밤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난 부모님은 집 구경, 동네 구경할 새도 없이 또 사위 차에 실려 병원으로 오셨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모든 계획은 그렇게 첫날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엄마는 힘들어하는 딸을 문 틈으로 들여다보며 눈물을 보이셨다.

드디어 분만실에 들어갔다. 나 혼자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남편도 따라 들어오라 했다.

곧바로 정신없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간호사들과 의사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소리는 필터를 거친 것처럼 몽롱하고 정신없이 들릴 뿐이었다.

진통은 점점 절정에 다다랐다. 한 달에 한번 악마가 찾아올 때의 그 느낌과 무척 비슷했지만, 한놈이 아니라 몇이 떼로 몰려온 그런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머릿속엔 책에서 강조했던 호흡법이 떠올랐다.

라마즈.. 짧게 몇 번 마시고 내쉬랬는데.. 이게 맞는 건가...?

난 습득한 지식을 최대한 떠올리며 책에 나온 숨쉬기를 따라 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후후 습습 후후 습습

몇 번이었는지 몇 초였는지 헷갈렸지만 열심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내 몸은 마치 뱅뱅 돌아가는 회오리 판 위에 올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산모에게 뭐라 떠들던 간호사들은 안 되겠던지 남편에게 뭐라 물어봤고, 잠시 후 그녀들은 다 같이 소리쳤다.


"힘 죠! 힘 죠! 힘 죠!"


한국말이었다.

결승전에서 고군분투하는 선수를 응원하듯, 그들은 박자를 맞춰가며 한 목소리로 나에게 소리쳤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말이다.

힘을 줘야 하는데 숨쉬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내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난 죽어버리자- 하는 심정으로 힘을 줬고 병원에 온 지 5시간도 되지 않아 내 인생 첫 번째 아이를 출산했다. 베테랑이었던 그 지긋한 간호사들의 떼창의 기운을 받고서!



도대체 예정일이 왜 틀렸던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성질 급한 큰 애가 빨리 나오고 싶어 그랬는지, 병원에서 알려준 예정일이 잘못이었는지

어쨌든 엄마는 부엌 구경도 하기 전에 미역국부터 끓여야 했고, 살림살이 파악아 안 된 상황에서 부엌에 있던 식모님의 쌀로 내 첫 끼를 지어 오셨다.

산후조리는 일주일만 받으려 했던 기특했던 계획과 달리 거의 꼬박 한 달을 미역국만 끓이셨다.


노인네들이 이곳에 오면 일주일 안에 물갈이 때문이던 날씨 때문이던 잠시 앓게 되신다.

더위에 힘들어하셨던 아빠가 먼저 앓아누우셨고, 아빠가 회복될 즈음 엄마가 몸져누우셨다.

이곳 산모들은 그냥 에어컨을 켜고 생활한다.

건기에 이곳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엄마 아빠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집에 와 일주일도 안돼 긴팔 긴바지에 에어컨 없이 버티다 온 몸이 땀띠로 뒤덮인 꼴을 보시더니, 이곳 방식에 따르게 되었다.


두 분의 발리 여행은 미리 예약해 둔 사항이었다.

엄마는 취소하라 하셨지만, 3주 가까이 더위 속에서 미역국을 끓여대신 엄마와 마땅히 할 일없는 더운 집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아빠를 위해 그럴 수가 없었다.

한국말을 좀 한다는 가이드를 붙여 두 분을 발리로 보내드렸고, 돌아와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발리에 다녀오신 아빠 왈,


"야, 하도 발리 발리 해서 엄청 좋은 줄 알았는데, 제주도만도 못하네. 지저분해-"


여튼 딸 둔 죄로, 멀리 보낸 죄로, 이 곳까지 날아오셨던 부모님은 둘째 때도 또 다시 이곳을 찾으셨다.

그땐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간 후였고, 첫애 때의 경험 덕분에 처음부터 상쾌하게 에어컨을 틀고 요령껏 산후조리를 했다.

첫애 때는 너무 빨리 나와서 문제였는데, 둘째 때는 만사태평한 이놈이 부모님 출국 날이 다가오는데도 나오질 않아 또 애를 먹었다. 빨리 좀 나오라고 주문을 외며 아파트 비상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결국 출국 1주일 전에 둘째 놈이 나왔고, 엄마는 일 이주 혼자라도 더 남아 미역국을 끓여주려 했지만, 한 달짜리 관광비자로 온 상황이라 연장하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들어 그냥 포기했다.


차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힘들게 두 번이나 비행기 타고 날아온 부모님과 내 분만 날짜는 어쩌면 그리 잘도 맞지 않았는지.

딱 맞았던 게 하나 있긴 하다.

큰 애가 나온 그 날이, 바로 엄마 아빠의 결혼 기념일 이었다.

덕분에 엄마 아빠는 큰 애 생일을 평생 잊지 못하시고, 나 역시 달력에 큰애 생일과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함께 적어 둔다. 그리고 매년 큰애 생일이면 꼭 한 마디씩 한다.


"넌 뭐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나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생을 시켰냐~"


하지만 큰 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더라. 난리 부르스였던 그때 그 상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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