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banjir(반지르)

by 타프씨

저녁 준비를 하며 뉴스를 듣고 있던 시각, 아빠에게 보이스 톡이 왔다.

같은 뉴스를 보고 계셨던 건지, 자카르타 홍수 소식에 전화를 하셨다.

내가 있는 곳은 괜찮다 하고 나도 몰랐던 심각한 상황을 한국 뉴스를 통해 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지역도 상습 침수 지역이라 하루 이틀 비가 쏟아지면 도로가 다 물에 잠기는데, 올해는 웬일로 이 지역은 말짱하다.

요즘 집에만 있기도 하고 내가 사는 곳이 멀쩡하다 보니, 시내 쪽이 그렇게 많이 잠겼는지 몰랐다.

지붕만 보이고 다 물에 잠긴 주택단지가 화면에 나왔다.

자카르타는 원래 몇 년 주기로 홍수가 난다고 알려졌지만 이상기후 때문인지, 이제 주기랄 것도 없이 매년이 다르다.

잘 화내지 않는 이곳 사람들 특성 탓에, 한 번씩 찾아오는 홍수를 꽤나 덤덤하게 받아들이곤 했는데,

코로나에 지진에 홍수까지..

작년부터 이곳은 정말 역대급으로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새벽 5시.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간단히 먹을 아침을 준비하려면 그쯤엔 일어나야 한다.

준비한 도시락을 현관문 앞 신발장 위에 올려두고

6시 5분, 작은 애 방으로 향한다.

6시도 아니고 5분에 깨우는 건, 아침의 일분 이분은 낮 시간의 십분 이십 분과도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침의 5분은 꽤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고, 아침의 5분 잠은 꽤 더 자고 일어난 듯한 기분을 들게도 한다.

둘째 놈은 느리다. 깨워 정신이 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방을 먼저 치고 들어가야 한다.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엉덩이를 꽉 물어주고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그렇게 먼저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어오게 해도 쉽게 눈을 뜨지 않는다.

"좋은 말 할 때 일어나라-" 엄포를 놓고 큰 딸애 방으로 간다.


문을 열며 동시에 "아침이네~ 일어나야 되네~ 학교 가기 좋은 날~" 같은 멘트를 날리면

딸애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딱 일어나 앉는다. 역시 눈을 뜨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큰 애가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문 소리가 들려야 둘째 놈이 쓱 방에서 나온다.

아이들은 그렇게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6시 30분이 되기 전에 차를 타러 내려간다.

새벽 5시부터 아이들과 남편이 출근할 때 까지는 매일 아침마다 작은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그렇게 세 김 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면 드디어 나만의 평화가 찾아온다.

오늘 새벽 업무 끝~ 하며 대충 정리하고 기분 좋게 안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다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한두 시간 정도 정말 꿀맛 나는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아침잠을 잤던 건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새벽 도시락을 싸고 얼마 후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버티다 보면 오후 시간쯤 방전되는 모습을 확인하고부터다.



그날도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고 신나게 꿀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빗방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밤부터 왔던 건지, 새벽부터 온 건지....

꿀잠 자라고 듣기 좋게 빗소리까지 들려주다니...

그렇게 곯아떨어졌다.


9시 반쯤인가, 맞춰둔 알람 소리에 깼다.

빗소리가 좀 세진 것 같았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핸드폰 무음을 해제하려 폰을 보니 뭔가 많은 게 떠 있었다.

보이스 톡. 카톡. 문자...

이게 다 뭔 일이지 싶어 하나씩 확인에 들어갔다.


이런. 반지르가 됐단다.

학교 앞에 물에 잠겨 애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단다.

아이가 학교에서 나가려면 부모가 직접 픽업을 하던지 담임과 직접 통화나 메시지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것 때문에 미친 듯이 연락을 했던 거였다. 큰 딸애도, 담임도, 지인 엄마들도.

단톡 방은 이미 난리가 났고 안 읽은 글이 백여 개에 달했다.

뒤늦게 일어나 그제야 마음 급해진 나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애들은 어찌 된 거지? 차를 보내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물이 얼마나 찬 거지? 갈 수는 있는 건가?

갑자기 땀이 났다. 실컷 자고 일어나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카톡을 확인하다 한 지인의 메시지에서 손이 멈췄다.


ㅣ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ㅣ야 지금 애들 집에 온다고 연락 왔어. 학교 앞이 다 잠겼대. 더 차면 차도 못 들어갈 거 같대.

ㅣ니네 차 회사에 있지?

ㅣ우리 애들 지금 나올 건데, 니네 애들도 같이 데려온다?

ㅣ연락 안 돼서 일단 다 같이 데리고 오라고 했어. 샘한테는 내가 통화해서 말했어.

ㅣ너 자냐??


마지막 글을 읽고 난 정말 너무 부끄러웠다..

애들은 학교 가서 재난 수준의 상황에 난리가 났는데, 엄마라는 인간은 꿀잠이나 쳐 자고 있던 거다.

친구 애까지 챙기려는 지인들의 애타는 연락에도

그냥 잠만 퍼질러 자고 있었던 거다.

면목이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얼른 지인과 통화를 했다.

첫마디가 일어났냐? 였다.

친한 지인들은 내가 아침잠을 잔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아서 그냥 우리 애들까지 샘 허락을 받고 그 집 차로 데리고 탈출을 한 거다.

그날의 상황을 알게 된 친한 동생은 날 대단하다고 했다.

비가 그렇게 오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잘 수 있었냐는 거다.

그러게나 말이다. 난 너무 걱정을 안 하는 게 문제긴 하다.


여튼 이런 무개념 아줌마 주변엔 좋은 지인들이 많았어서 다행히 애들은 그 집으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그 집에 가서 아침에 싸간 도시락 꺼내 먹고 지들끼리는 신나게 잘도 놀고 있었다.

점심 즈음에 비는 그쳤지만, 도로는 다 잠긴 상태였다.

학교 가는 중간에 있는 작은 호수(나와 애들은 똥물이라고 불렀다)도 넘쳐 호수 옆 도로와 호수가 그냥 하나의 저수지가 됐다고 했다.

남편도 회사 인근 지역이 다 물에 잠겨 지금 퇴근 중이라고 연락이 왔다.

애들 학교는 괜찮냐며 묻는데, 그때는 내 꿀잠 얘기는 하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 있다고만 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피신 간 그 친구네 아파트와 내가 사는 아파트 사이의 길도 다 물에 잠겼다는 거였다.

비는 그쳤지만 차는 이미 다닐 수 없는 상태였다.

남편도 도로가 무사한 곳 까지만 차로 오고 잠긴 도로부터는 걸어서 집으로 오고 있었다.

이 정도 물이 차면 빠지는 데 보통 하루 이틀 넘게 걸린다.

물이 빠질 때까지 그 집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아침부터 너무 큰 신세를 졌는데 말이다)

어쩌나 난감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물길을 거슬러 가서 애들을 하나씩 업어 오는 것.

집에 도착한 남편과 머리를 굴려봤다.

내가 둘째를 남편이 큰 애를 업고 오자 했으나, 삐쩍 마른 내 몰골에 남편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했다.

업고 오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자기가 셋을 다 어쩌냐는 거다.

나도 사실 자신이 없긴 했다. 그냥 업어 오는 것도 힘든데 애를 업고 허벅지를 넘는 물길을 가르고 온다는 건, 내 체력으로는 안될 거 같았다.

미안했지만 결국 남편이 두 번 왕복으로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대신 난 우리 아파트 옆에 붙어있던 롯데마트 주차장에서 카트와 함께 대기하다가

애를 넘겨받아 카트에 태우기로 했다.


물은 남편 허벅지 정도까지 찼었다. 남편이 178센티니 아마 나였다면 엉덩이까지 잠겼을지도 모르겠다.

큰 애가 3, 4학년 정도였던 시기였으니 그 애를 업고 물길을 걸어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좀 더 작은 둘째를 업고 마트까지 왔다.

애들은 처음 겪는 그 난리가 반복적인 일상에 일어난 무슨 이벤트처럼 느껴지는지 죄다 신나고 재밌어했다.

아빠 등에 업혀 오는 내내 신났다고 재밌다고 들썩이는 바람에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건네받은 둘째를 나는 카트에 태웠다. 큰애와 한 번에 데려가기로 하고 다시 남편을 기다렸다.

큰 놈이라고 좀 더 길쭉하고 무거운 딸을 데리고 오는 남편 얼굴이 아주 기진맥진이었다.

아빠는 힘들어 죽겠다는데 철없는 딸은 오랜만에 업혀보는 아빠 등이 좋았는지 파닥파닥 발을 흔들어 댔다.


그렇게 두 애들을 카트에 태우고 수영장이 된 마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아파트로 향했다.


"엄마 빨리 더 빨리~"

"와~ 재밌다~"


카트 바닥으로 찰랑찰랑 물이 차서 아이들은 앉지 못하고 서서 하나씩 나와 남편 목을 잡고 그렇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우린 죽겠는데 애들은 아주 활짝 이었다.

옆으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는 언니와 아저씨가 작은 딸을 카트에 태워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 얘네 신났네~ ㅎㅎㅎ"


그 집 딸은 중학생에 키도 꽤 큰 아이였는데도 나처럼 여자애라 못 걸어가게 했다고 한다.

빗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똥물이라 부르는 개천이나 호수 물이 다 섞인 진흙탕이다 보니

특히 여자애들은 더 물에서 걷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소동 이후 애들은 잠들기 전 비가 오는 날이면 주문을 외우고 잠에 들었다.


"내일 반지르 나라 반지르 나라...."


그리고 아침잠을 깨울 땐 웬일로 눈을 번쩍 뜨고 묻는다.


"지금도 비와? 반지르 났어??"

"아뉘! 비 한 톨도 안 오거든!"



내가 사는 지역은 예전에 습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물이 더 잘 안 빠져서 항상 비만 오면 잠기는 곳이었다.

재작년부터인가.. 이 동네 길거리에 하수도 관 공사를 시작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잘 나가질 않아 공사가 끝났는지도 잘 몰랐는데, 올해는 그 덕을 톡톡히 본 듯하다.

아이들을 업어 날랐던 그 당시, 물 빠진 도로나 길가에 물뱀 같은 게 꽤 있었다고 한다.

또 학교 가는 중간에 있던 그 호수에서는 작은 악어도 나와 현지 신문에도 실리기도 했다.

현지 애들은 그 물에서 물놀이하듯 놀기도 한다.

그걸 보면 난 제발 그러지 말라고... 피부 다 썩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제 이 동네가 웬만하면 반지르 되지 않을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

애들은 어떤 표정들을 지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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