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하지 않은 진짜 찬물이면 좋겠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을 받아 양치를 하고 싶다.
쌀도 수돗물로 편하게 씻고 싶다.
포도를 씻다 그대로 집어먹어 보고도 싶다.
수돗물로 헹군 그릇들을 그대로 식기 건조대에 두고 싶다.
사골을 끓일만한 통 큰 냄비에 시원하게 물을 틀어 담고 싶다.
황토 약탕기에 깨끗한 수돗물을 받아 어머님이 보내주신 상황버섯을 실컷 다려마시고 싶다.
인니에 살고 있는 한 중년 아줌마의 소소한 바람이다.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가면, 밤새 불편한 잠을 설친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침 비행기에서 내린다.
비행기를 나와 첫 번째로 나오는 화장실에 들어가, 사람 같아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한다.
준비해 온 칫솔로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구려다, 멈칫한다.
아주 잠깐 물통을 찾던 내 손을 보고 깨닫는다.
'아, 여기 한국이지~'
그리고 마음껏 두 손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고양이 세수도 한다.
한국에 갔음을 실감하게 하는 첫 번째 일을 공항 화장실에서 겪는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물이 깨끗한 나라다. 석회질 성분도 없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대부분의 동남아, 유럽,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많은 나라의 수돗물에는 석회질이 함유된 물이 나온다.
그나마 선진국이어서 상수도 시설을 잘 갖춘 유럽의 나라들을 제외하고
보통 이런 수돗물을 바로 사용하기란 쉽지 않다.
정수기 물이나 식용 물로 재료들을 한 번 더 헹구고 수돗물로 세제를 씻어낸 그릇들은 다시 한번 헹궈서 식기 건조대에 놓아야 한다. 그래도 다 마른 그릇 바닥에는 동그랗고 허연 그림자가 남는다.
한 달에 한 번씩 싱크대 정수기 필터도 갈아줘야 하고
일주일, 아니 닷새만 지나도 진흙 구덩이에 넣었다 뺀 것처럼 변해있는 필터도 바꿔줘야 한다.
이 모든 수고로움 없이 이곳의 물은, 그냥 사용할 수가 없다.
인니의 물가는 싸지 않다.
일반 현지인들이 사는 집에서,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이 가는 시장에 다니며 그들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상, 우리가 접하는 물가는 그들의 것과 다르다.
이곳에서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고정비 중에 물과 관련해 나가는 돈도 상당하다.
일단, 먹는 물은 대부분 생수를 시켜 먹는다.
물론 마실수 있는 정수기를 설치해 정수기 물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석회질은 정수기로도 거르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부터는 그냥, 대기업 물이 낫겠다 싶어 네슬레 생수를 주문해 마신다.
1.5l짜리 생수를 그냥 마시기만 하면 좋겠지만, 나는 그 물을 음식을 만들 때도, 재료를 헹굴 때에도 모두 사용한다. 암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 좀 더 철저하게 헹굼질을 하고 있다. (물론 석회질과 암과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덜 먹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비싼 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자체적으로 수도에 정수기를 설치했다는 곳도 있다지만, 난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오래 산 남자분들 중 요로 결석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여자도 있긴 하지만 특히 남자들이 바깥 음식을 더 자주 접하게 되니, 그만큼 알게 모르게 더 많은 석회질을 섭취하는 듯하다.
한바탕 벽을 타고 기어오를 정도라는 그 고통을 겪고 한국을 다녀온 후부터는, 비싸도 수입한 한국물을 마시는 집들도 꽤 있다.
먹는 것과 관련되지 않은 그냥 사용하는 모든 물도, 다 필터를 거치게 한다.
싱크대는 당연하고, 세탁기 수도에도, 각 화장실의 샤워기와 세면대 밑에도, 물이 나오는 구멍이란 구멍은 다 필터를 거치게끔 한다.
이런 필터는 보통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꽤 큰 필터를 사용하는데, 눈에 보이다 보니 이렇게 예민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눈앞에서 새 필터가 바로 누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예민도 유난도 떨 수밖에 없다.
이런 필터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수시로 갈아주는 편이고
싱크대 필터는 한국분이 운영하는 업체에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와서 교체를 한다.
먹는 물 값 따로, 쓰는 물 값 따로, 필터 값 따로. 원화로 치면 대략 한 달에 10-15만 원가량은 물과 관련해 먹고 쓰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나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몇 명의 가족이 생활하는지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이곳에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 아주 많아, 일 이주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번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던 남편이 오는 주말부부들이 많다. 그런 경우 엄마와 아이 한두 명만 생활한다면, 물값도 확실히 적게 나오긴 한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나는, 매일같이 네 식구가 옥신각신 아웅다웅 투닥거리며 먹고 마시고 씻고 하려니 물값이 더 나오는 경우다.
이곳에 사는, 그리고 석회질 수돗물이 나오는 해외에 사는 교민이라면, 한국에 가서 제일 속 시원하고 좋은 게 바로 물을 맘 편히 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어린 아기를 키우는 엄마라면, 아마 감격에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웃기네..라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다. 진짜 그런 심정이니까.
이곳에 처음 와서 주택에 살던 당시에는, 디스펜서 위에 커다란 물통을 거꾸로 꽂아 쓰는 물을 사용했다.
우리 아이들의 아기 시절 동안은 거의 그 물을 사용했던 거 같다.
이곳에도 많은 생수 브랜드들이 있는데, 그중 아쿠아(AQUA)라는 가장 큰 현지 브랜드의 물을 사다 먹었다.
조금씩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주워듣는 얘기도 많아지고 얻는 정보도 다양해졌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마셨던 그 큰 정수기 물이 그렇게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통이 생각보다 깨끗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얘기와, 내가 쓴 통을 다시 쓰는 게 아니니 어느 누가 어떻게 썼는지 모르는 통에 담긴 물이라는, 물론 공장에서 세척이야 하겠지만, 그것 역시 내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니 얼마나 잘 세척이 될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런 얘기를 듣고부터 길을 가다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현지인들 옆에 마구 뒹구는 아쿠아 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디스펜서를 통한 큰 통의 물은 사 먹지 못하게 됐다.
디스펜서도 사실 물관이나 내부를 관리해주어야 한다는데, 난 한 번도 관리를 받은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활을 하긴 하였으나,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닥 깨끗하지 못한 물을 먹여 키웠다는 미안함은 아직도 남아있다. 기억은 못하는 나이여서 아직 원망은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자카르타에 오셨다면, 혹은 발리나 롬복에 여행을 오셨다면, 꼭 기억하시라.
양치할 때 수돗물을 그냥 받아 쓰지 마시라는 점을.
그 어느 곳이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그대로 받아 입을 헹구는 일은,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