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뭔가에 맞고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을 때, 캐릭터 얼굴 위로 별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게 표현된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알고 그렇게 그린 걸까?
그건 만화에만 나오는 상황이 아니다. 진짜로 그렇다.
별이 정말, 빙글빙글거린다.
나는 유난히 심한 생리통을 앓았다.
한두 달에 한번 찾아오는 이 고통의 시간이 싫어 엄마에게 꽤 진지한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나 수술해버릴까? 어차피 결혼도 안 할 건데, 그냥 드러내 버릴까?"
"으이구 미친뇬"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엄마도 농담처럼 욕을 날리셨다. 그리고 잠시 뒤, 사뭇 진지하게 말하셨다.
"자식이라는 게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증거인데, 결혼 해 자식 안 낳으면 넌 뭘 남길래..?"
'명성'이요, '명예'요, 이따구 말을 부르짖고 싶었지만, 그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말았다.
하지만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 정도의 시간을 매달 겪어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고 1 즈음으로 기억한다.
아침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오며 미리 약을 먹고 나왔다. 그 악마가 언제 갑자기 닥칠지 모르니.
타이레놀은 좀 약한 약이어서 한 번에 2알씩 먹게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난 4알을 먹었다.
보통 사람들이 겪는 정도와 배 정도는 차이가 나니, 약도 배로 먹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든든하게 약을 먹고 아침 자율학습을 하는 중이었는데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던 내 얼굴에서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꿈틀꿈틀.. 움찔움찔..
내 얼굴 피부 안에서 어떤 벌레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쑤욱- 내 눈 밑으로 내 입술이 보이는 게 아닌가...?!
"야, 나 얼굴 이상해...?"
난 조용히 짝꿍을 보며 물었다.
"으 악- 야 니 얼굴 왜 이래-!"
순식간에 교실은 어수선해졌고 아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입술과 눈 밑, 얼굴 여기저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마치 벌통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곧바로 양호실로 달려갔고, 양호 선생님께 아침에 내가 한 짓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빨리 학교 앞 약국에 가서 해독제를 사 먹고 오라 하셨고
난 그 흉측한 얼굴을 최대한 가리며 약국으로 가, 자초 지경을 설명하고 해독제를 사 먹었다.
신기하게도 잠시 뒤, 불뚝불뚝 부어올랐던 얼굴은 슬 가라앉았고
그 이후 난, 그 약하다는 타이레놀을 한 알만 먹어도 입가가 스멀스멀하고 눈 밑도 들썩들썩해지는 타이레놀 부작용을 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지.. 싶지만, 아직도 그때의 내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 악마 같은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아주 세게 약을 치고 싶었던 십 대 소녀의 순진했던 그 심정.
이후로도 난 약 먹을 때를 조금만 놓쳐도 급습한 그 고통에 넉다운돼 가장 덩치 큰 반 친구 등에 업혀 양호실로 실려가는 일을 몇 차례나 반복했다.
가장 큰 사건은 부산영화제에서였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고, 부산 영화제가 발촉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였다.
해운대 쪽으론 상영관도 있지 않아 모든 영화가 자갈치 시장 부근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하필이면 그때, 그 악마란 놈이 찾아왔다!
사실 나에겐 일정한 주기도 없었다.
어쩔 땐 두 달도 더 있다가, 어쩔 땐 한 달에 며칠씩 몇 번을.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함께 간 영화사 직원도 가져온 진통제가 없었다.
아침에 호텔을 나오며 현장에 가서 사 먹어야지.. 했지만
막상 화려하고 가슴 벅찬 영화제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대로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각자 마지막 영화까지 보고,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 돌아가기로 약속했고, 그 마지막 영화를 보기 위한 입장을 하게 되었다.
점심이 지나면서부터 느낌이 오긴 했다.
이제 곧 그 악마가 나타날 거야. 준비해..
몇 번이나 내 몸이 경고를 보냈지만, 뛰어다니며 영화를 관람해야 할 만큼 빡빡한 일정을 짜 놓았던 탓에 미루고 미루며 꾸역꾸역 그 시간까지 오게 된 거였다.
마지막 영화니까.. 이것만 끝나고 약 먹자. 두세 시간만 버텨보자..
버틴다고 될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면서, 참 미련하고도 고집스러웠다.
지정된 자석에 앉았다 다시 일어나 맨 뒤로 갔다.
당시에는 오래된 큰 영화관들이 많았고, 영화제를 찾아온 손님이 많아 맨 뒤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에도 의자를 놓고 앉을 수 있게 해 놓았다.
난 앞쪽 내 자리를 양보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빨리 문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곧 실내가 어두워지고 음악과 함께 영화가 시작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보려 했던 영화가 뭐였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한 지 십여분 지났을 무렵,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는 때에 이르렀다는 걸 깨달았고,
조용히 영화관을 빠져나와 뒤틀리는 배를 끌어안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날, 하늘의 별들과 네온사인이 힘을 합쳐 영화제 성공을 위해 반짝거리던 그 화려했던 바로 그날,
난 자갈치 시장의 한 영화관 화장실 안에서, 내 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별을 보고야 말았다.
이미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반은 맛이 간 상태였다. 그때까지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모른척하며 영화를 보고 다닐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배와 허리가 아팠던 거지, 크게 볼일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에,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주섬주섬 정리를 하고 화장실을 나오려 하였으나,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몇 차례나 경고를 날렸던 악마는 더 이상의 관용 없이 한순간에 나를 덮쳤다.
그리고 완전히 화면이 꺼졌다.
화장실 안이라 봤자 좁은 공간이니, 내가 쓰러진 바로 앞은 문이었고, 손만 뻗으면 문고리를 옆으로 밀고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할 수가 없었다.
암흑에서 보이는 거라곤 정신없이 반짝거리는 별들 뿐.
정말 많았다.. 너무 많았다..
꼼짝을 할 수가 없었고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저 무수히 반짝이는 것들이 어지럽고 정신없게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신기한 건, 소리는 다 들리고 있었다는 거다.
시력이 사라지니 그 능력이 다 청력으로 몰린 기분이랄까.
꼼짝달싹 못하는 내 귀에 영화관 입장을 마치고 문 밖에 모여 떠들고 있는 자원봉사자 학생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들렸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과 힘들었던 일,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등의 얘기로 그들의 추억을 쌓고 있었다.
이대로 더 방치되었다가는 정말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난 내 몸에 남아있는 모든 기력을 목구멍으로 끌어모았다.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빌어먹게도 내 개미 같은 목소리는 그들의 수다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게 신나고 즐거웠던 청춘들의 목소리는 높고, 꽤나 시끄러웠다.
잠시 잠깐, 내가 이대로 발견돼도 되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쓰러져있는 내 모습은 어떤지, 옷은 제대로 다 입은 게 맞는지, 들어오더라도 문은 내가 열어줘야 하는데 어떻게 열지..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내 입은 계속 힘겨운 소리를 내고 있었고, 마침내, 한 여학생이 그 간절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야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려?"
"소리? 무슨 소리?"
"잠깐만 조용히 해봐 봐"
"살려주세요...! 화장실... 이요...!"
마지막 힘을 다했고, 드디어 여학생 한 무리가 달려 들어왔다.
난 손끝을 움직여 문을 두드려 위치를 알렸고, 문 밖에 대기 중이던 남학생들까지 들어와 내 구조에 나섰다.
문제는 문을 내가 열어야 한다는 거였다.
난 도저히 몸을 일으켜 세워 문고리를 열 힘이 없었다. 간신히 손끝만 움직일 뿐이었다.
구해주러 왔는데,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하는데, 내 몸이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았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안 되겠던지 몇몇 남학생들은 옆 칸으로 들어가 위로 타고 넘어 가야겠다며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진심 어린 노력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렸던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손을 뻗쳤다!
문이 열리는 과 동시에 다시 쓰러진 나를 몇 명인지 모르는 인원이 들고나가 모여 앉아있던 책상 옆에 눕혔다.
이젠 살겠구나 하는 안심과 함께, 그 정신없던 별들도 조금씩 잦아들고 다시 화면도 뿌옇게 돌아왔다.
영화제 중 화장실에 쓰러진 사람을 들고 나오는 일은 그들도 처음이었겠지..
학생들은 무슨 사건이나 난 것처럼 흥분했고 부산했고 시끄러웠다. 구급차를 부르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목에 걸고 있던 게스트 카드가 내 신상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난 조용히 옆에 있던 여학생에게 말했다.
"저기.. 진통제 좀.. 생리통이에요..."
"네? 생리통이요..?!"
순간 매너 있는 그 여학생은 어수선한 남학생들에게 아무 말 안 하고 약을 사러 뛰어 나갔고
구급차가 도착할 즈음, 부리나케 달려와 내 손에 진통제와 생수를 쥐어 주었다.
저녁시간의 영화제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곳을 뚫고 힘겹게 구급차가 영화관 앞까지 도착했고, 난 그 여학생의 도움으로 진통제를 먹고 들것에 들려 구급차에 실렸다.
구급차는 왜 사이렌 소리를 울리는 걸까?
여기 이 여자 좀 봐라~ 광고하듯 울리는 그 소리가 난 너무 부담스러웠다. 인파 속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구급차 창문 밖으로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목을 빼고 들여다보았다.
실려 가는 동안, 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약발과 소리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통증을.
떡실신의 모습으로 차에 실렸으나 이동하는 동안 내 몸은 회복하고 있었고,
호텔에 도착했을 땐, 거짓말처럼 말짱해진 상태였다.
병원으로 가려는 걸 호텔로 가달라고 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십 분도 안 되는 사이에 다시 환생한 나는 구급차에서 내리며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고마운 그들의 얼굴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민망함과 미안함에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차를 돌려보내고 호텔로 버젓이 걸어 들어갔다.
그날의 사건은 나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악마의 신호를 절대 모른 척하지 말 것.
가방에는 항시 어느 순간이라도 삼킬 수 있는 진통제와 물을 지참할 것.
수술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볼 것....
별은 본 게 그때가 처음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도 물론 있었다.
수업 중 낌새를 맡고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갑자기 화면이 CG처럼 변하는 경험은 그때도 몇 번 해봤다.
반짝거리는 것들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여 벽을 손으로 짚으며 화장실을 빠져나와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놀란 선생님이 나를 꾸짖으며 양호실로 실려 보내셨다.
미련하게 이 정도가 되도록 왜 약을 안 먹었냐 하셨다.
마약 같은 알약 한 두 알이면, 그렇게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수가 있었고,
난 어린 마음에 그게 좀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몸이 약만 삼키면 멀쩡하게 되는 경험은, 이러다 약에 중독되는 게 아닌 가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생애 최고의 별이었던 부산의 한 영화관 화장실.
당시 내 가녀린 목소리를 들어준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런지.
정말 기적같이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렴풋한 청춘의 기억 어딘가에, 자갈치 시장 영화관에 쓰러진 여자를 보았던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이라도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당시엔 정신이 없어 제대로 된 인사도 못 건네었던 거 같다.
정말, 너무, 감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아, 그리고 세상에 반짝거리는 별들이, 다 그렇게 예쁜 것만은 아니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