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병에 걸려서..

by 타프씨

남편과 통화를 했다.


"나 암인가 봐. 아 씨.. 큰일 났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꽤 담담할 수 있었다.

엄마와 언니가 지나간 길을 봐왔기에, 나도 언젠가는 걸리겠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았다.

유전이 아니어도 암에 걸리는 세상 아닌가.

올 것이 왔구나.. 근데 생각보단 좀 빨리 왔구나.. 했다.

조기발견이라는 말은 나만 획득한 보너스 같았고, 상황을 아프게 받아들일 이유는 별로 없었다.

난 다른 것들 때문에 마구 머리를 굴려야 했다.


난 한국에 살고 있지 않다.

내 집은 비행기로 7시간 날아가야 하는 곳에 있고 남편도 그곳에 있다.

아이들과는 방학 중 한 달간 찾은 방문이었다.

출국 날은 이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큰 애는 한국 나이로 중2, 둘째는 초등 5학년이었다. 더 어린 나이에 발병하지 않았다는 걸 잠시, 감사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 애들이었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 나이였다.

방학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해야 하고 난 또 새벽 도시락과의 사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내가 처한 이 조건들에 나의 수술과 치료 일정을 짜 맞춰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거다.


수술을 받고 치료까지 마치려면 족히 두 세 달 은 걸릴 터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끼니. 그놈의 밥이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남편이 빨리 퇴근하고 오면 7시 전후.

아침에 간식에 점심 도시락에 저녁까지. 온전히 내가 직업으로 챙겼던 부분의 공백을 셋이 해결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 도시락까지 싸는 건 무리였다.

아이들은 학교 캔틴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남편도 나름 계획을 세웠다. 저녁에 와서 밥을 하기엔 시간이 빠듯하니 아침에 저녁밥까지 해놓고

저녁에 퇴근해서는 차려만 먹기로 하였다.


끼니 말고도 신경 쓰이는 건 많았다.

돌아가면 당장 개학이고 새 학년의 1학기가 시작될 거였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많은 이곳 학교들은 80년대 내가 달력으로 책을 쌌던 것처럼 새 책과 노트의 겉을 싸줘야 한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이곳 서점이나 문구점에는 책 싸게 용 누런 종이와 둘둘 말린 비닐이 쌓여있다.

해마다 삼사십 권 넘는 두 아이의 책과 노트를 쌀 때마다 이게 또 무슨 낭비냐며 욕을 했다. 몇십 년 전이지만 어려서 싸 본 경험이 있다고 쓱쓱 싸 대는 모습을 아이들은 무척 경이롭게 보기도 했었다.

과연 남편이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학비도 내야 했다. 그러려면 먼저 환전소에 들러야 하고 은행에서 이체를 한 후 학교 사무실에 들러 Fee card에 체크를 받아야 한다.

관리비도 내야 했다. 곧 세 달에 한번 돌아오는 기본 관리비를 내는 달이었다.

아 쌀.. 쌀은 얼마나 남아있었지? 김치는 넉넉한가...? 물도 시켜야 하는데?

애들이 가져갈 먹거리들은 냉동실이랑 냉장실에 잘 나눠서 보관하려나?

잘 때 에어컨은 꼭 타이머를 맞춰서 꺼지게 해야 하는데. 밤새 틀었다간 금방 기침을 할지도 모른다. 잊지 않고 잘하려나..?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사라진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로 머릿속이 정신이 없었다.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은 유방갑상선 전문 병원이었다. 언니 엄마가 수술을 받은 큰 종합병원은 아니었으나

언제 수술해 줄 수 있는지가 나에게는 가장 큰 조건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는 곳이 당시 내게는 가장 좋은 병원이었다.

큰 병원으로 옮기려면 몇 주는 더 미뤄질 수 있었다.

언니와 친구들은 큰 병원에 가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고 수술 일정을 잡기를 권했지만, 난 하루라도 빨리 해치우고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검진을 받았던 병원에서 다시 정밀 검사를 받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남편은 일주일 일정으로 부랴부랴 입국했다.

수술 이틀 전 입국해 수술하고 입원한 동안 나를 지켜주다 퇴원 하루 전날 출국했다.

입국해서 다시 돌아갈 때까지 한시도 편한 시간 없이 보내다 큰 마음의 짐을 안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이라도 아이들을 챙기는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들은 최대한 있을 수 있는 날짜까지 출국날을 미뤘다.

이곳이었다면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나 삼촌 이모 고모들이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돌아가면 온전히 남편이 떠안아야 할 숙제였기에, 최대한 그 시간을 줄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 비행기 표는 그보다 더 뒤로 미뤄야 했다.

항공사에 전화해 출국 날짜를 두 달가량 미뤄달라고 했다.


"김 00, 김 00도 같이 변경하시나요?"

"아니요. 저만요"

"아.. 그럼 아이들만 먼저 출국하시나요?"

"네....."


잠시 잠깐 뭔가 구구절절 내 사정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다행히 친절한 항공사 직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둘째가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알려 주었다. 만 12세 미만이고 동행하는 큰 애가 성인이 아니므로 둘째와 함께 케어를 해 줄 수 있을 거라 설명했다.

짐 하나를 덜었다.

애들만 달랑 비행기에 태워 보내야 하는 게 가장 첫 번째 걱정거리였는데, 큰 시름을 덜게 됐다.



판정을 받고 아이들을 따로 불러 얘기를 했다.


"엄마가 암 이래. 수술해야 한대"

"진짜...? 언제..?"

"정밀 검사받아보고 날 잡아야지. 그래서 엄마는 좀 더 있다 가야 할 거 같애"


둘만 먼저 들어가야 하고, 가서 엄마 없이 일단 개학하고 학교를 다녀야 하고, 아빠랑 저녁을 해 먹어야 한다는 처음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 말라며 나름 엄마를 위로했다.

첫째는 어쩔 수 없는지 큰 딸애는 학교 갔다 와서 동생이랑 자기 간식은 알아서 챙기겠다고 했다. 저녁도 아빠 오기 전에 찌개 같은 건 미리 데워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기특했다. 실제로 동생 간식을 챙겨주는 사진을 거의 매일 보내며 그런 기특한 일들을 해냈다.



암 진단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건,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냈던 그날이 유일했다.

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고, 내 병이 싫어 운 적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나에게서 떨어지는 처음 겪는 그 상황이 속상했다.

인니에서 낳아 키우며 한 번도 손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나 때문에 생이별을 하고 안 겪어도 될 일을 겪게 한다는 미안함이 컸다.

공항에서는 울지 않았다.

케어 서비스를 처음 받다 보니 낯선 절차에 애들도 나도 얼떨떨해하다가 그만 헤어졌다.

애들은 예쁜 항공사 언니를 따라 평소와는 다른 문으로 어색해하며 들어갔고

난 돌아오는 내내 게이트에는 잘 갔는지, 화장실은 급하지 않게 미리미리 다녀왔을지, 여권과 비행기 표는 잘 챙기고 있는지, 어른들 사이에서 둘만 무섭진 않을지, 온갖 걱정들로 머릿속이 범벅이었다.

그렇게 아파트에 도착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드디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쳐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아침까지도 시끄럽게 짐을 싸던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집에 들어서니,

그제야 이제 나만 남았고,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일정들이 비로소 실감 났다.

병을 물려줬단 생각에 미안해할 엄마 앞에서 가능하면 울지 않으려 했지만

내 자식을 떠나보낸 나 역시, 어미였다.

그대로 방안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자식이 새끼들과 헤어지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엄마도 거실에서 한참을 우셨다.



그날 이후 난 씩씩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2018년도의 여름은 역대 한국 최고 기온을 달성한, 적도 보다 더 더웠던 날들이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버스를 타고 방사선 실을 오가는 일정이 쉽진 않았지만, 쓰러 질 거 같으면 잠시 쉬어 가고, 더우면 옆에 있는 편의점에 괜히 들려 땀을 식혀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매일 열두 번도 넘게 아이들과 남편과 통화하며 몸만 한국에 있지 생활은 인니 집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주변엔 응답하라보다 더 감사하고 사랑스러운 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 둘 보내준 반찬과 찌개와 간식거리들이 냉장고에 쌓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남편은


"이제 그만들 좀 보내시라 그래~ 냉장고에 넣을 데가 없다~"


는 배부른 호소를 하기에 이르렀고, 난 7시간 떨어진 먼 곳에서조차 그들의 온정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난 꽤 잘, 큰 불만없이 내 병과의 동거를 하고 있었다.

6개월에 한 번씩 일주일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가 정기검사를 받고 6개월치 약을 받아오며 수술 후 3년 째를 맞고 있다. 작년 겨울엔 정기 검진을 받지 못했다.

격리 2주에 검진까지 최소 3주가 걸리는 일정을, 더구나 코로나 시국에,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병원과 통화해 언니가 대신 비급여로 대리처방을 받아 앞으로 버틸 6개월 분 약을 받았고, 마침 갑자기 한국에 방문했던 지인을 통해 약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이 시국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요즘, 좀 맘이 안 좋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짜증 나고 걸리적거리게 불편하다.


고맙고 사랑스러운 지인들 중엔 동갑친구여서 더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며칠 후면 한국으로 가게 된다.

Pulang. 뿔랑.

이곳에선 그렇게 부른다. 귀국하다. 돌아가다..

해외 주재원으로 나왔다면 그 시간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거나

사업을 했다면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걸, 뿔랑이라 부른다.

그 친구도 하나 있는 아들의 대학 입학과 함께 뿔랑 하게 되었다.


이곳에 18년 가까이 살다 보니 이제는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보다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

애들 어릴 적 함께 둘째를 낳고 키우며 재밌게 지냈던 절친의 뿔랑 이후, 난 이곳 지인들과의 헤어짐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교훈처럼 안고 살았다.

뭐 이곳에서의 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요즘 시대에 의지만 있다면 평생 연락하고 살 수 있으니까 조금 덜 아쉬워해도 되겠지만,

지금, 이 코로나라는 이 시국에, 하필,

난 왜 암에는 걸렸어서, 떠날 친구에게 밥 한 끼 술 한잔도 건네지 못하고 있는 건지...!

작년 연말 모임을 다시 연초로 미루고, 상황 봐서 보자던 게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다 보니 결국 떠날 날이 다가오도록 이러고만 있다.

내가 그냥 평범한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이곳이 한국이었어도, 당연히 이러고 있지만은 않았겠지. 하지만 지난해 아는 지인 분이 코로나로 돌아가시는 걸 보고 듣고, 아무런 정확한 정보조차 공유되지 않는 이곳 실정 덕분에, 난 내 집의 시계로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뭐 밥 한 끼 먹는 건데 어떻겠어- 그냥 객기를 부리고 싶다가도, 암 걸린 와이프와 천식이 있는 큰 딸 때문에 집에서도 조심스러워하는 남편 생각을 하면 또 그럴 수가 없다.

그리고 나 자신도 사실, 겁이 난다.

그래서 짜증이 난다.

마스크 끼고 커피 한잔 간신히 마실수밖에 없는 이 불편한 상황을 내가 만든 것 같아 속상하고

친구에게 미안하다.

내가 걸린 병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요즘은, 그러고 있다.




.. 야...


나중에 이 개떡 같은 바이러스 따위 다 사라지고

걱정 없이 만나 돌아다닐 수 있는 때에, 부산에 내려가 지금 해주지 못한 아쉬움들 꼭, 다 갚을게.

알지...?

하필 이런 몸이어서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고,

또 즐거웠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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