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른이 될 서로에게
2023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의 두 번째 응급실을 엄마와 함께 갔기 때문이다.
언니네 식구가 친정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럼 우리도 함께 갈까?' 하고 찾아간 친정이었다.
엄마는 퇴직은 하셨지만 알바로 고용이 가능한 그 이전 직장에
매우 자주 알바로 일을 다녀오시곤 했다.
이 날도 그렇게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을 하고 돌아오셨다.
아빠가 한 박스를 사 들고 오신 감자가 화근이었다.
집에 놀러 온 가족들에게 주고 싶어 엄마는 '감자전 해줄까?'
라는 말과 함께 감자전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매우 잘 드는 채칼이 문제였다.
그 채칼이 감자와 함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 끝을 함께 베어버린 것이다.
피가 멎어야 하는데 쉽게 멎지 않았다.
손에 함께 잡고 있던 휴지가 빨갛게 물들었는데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혈을 하느라 엄마의 손이 얼마나 다친 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휴지를 적셔버린 피로 그 상처의 깊이를 가늠할 뿐이었다.
자꾸만 살짝 베였다고만 말하는 엄마의 말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떨어진 살점, 손톱도 비스듬하게 잘려 나갔다.
모세혈관이 많이 모여있는 손가락이라 그런지
쉽게 피가 멎지도 않았다.
비교적 침착한 편인 남편이 "어머니, 상처가 좀 심한데요?"라고 말하며
병원에 가보는 걸 권한다. 그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렇게 엄마와 나, 남편은 셋이서 가장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딸과 사위에게 미안한 엄마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응급실을 차를 타고 가기 전에,
이것이 응급실을 가야 하는 상처인지 아닌지를 119에 전화해서 물어보고
조치를 취해볼까도 생각을 했지만, 엄마는 119를 부르기도 민망해하셨기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응급실은 2명만 출입이 가능했다.
즉 다친 환자와, 1명의 보호자. 남편은 차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이라 그런지,
병원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이미 '오래 기다리셔야 한다.'는 안내멘트를 먼저 건넨다.
어깨에 보호대를 하고 앉아있는 사람, 아픈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
엄마와 똑같이 손에 붕대를 한 채 앉아있는 아주머니 등
다양한 이유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로 대기실은 꽉 차 있었다.
1차로 소독과 함께 상처부위를 살펴봐 주었다.
“잘린 부분은 안 가져오셨어요?”
다소 엽기적으로 느껴지는 질문을 듣자,
엄마가 “살짝 베인 거라... 없어요”
라며 자신의 상처를 여전히 과소 평가한다.
겨우 만난 의사가 말한다.
엄마는 심하게 잘린 것이 아니라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리면 될거라 했다.
때로는 꼭 봉합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에.
우리 뒤로도 다른 응급환자가 또 들어왔다.
젊은 여성이었는데 옷에 피가 묻어 있고, 머리도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일행 한 명과 함께였는데
“어디서 다치신 거예요?”
라는 물음에
“화장실에서 넘어졌어요.”
“술 드셨어요?”
“네 술 먹었어요.”
아...
술 먹고 만취되어 화장실에서 넘어졌구나.
화장실은 그 자체로도 위험한데, 술까지 마셨으니 위험도는 훨씬 더 증가했을 것이다.
엄마와 같이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심장보다 높이 들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분께서는 아무래도 봉합수술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밀려있는 중증 환자가 50명이 넘는단다,
그 환자들을 보고 난 뒤에는 수술차례가 4시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아. 마음대로 아파도 안 되겠구나.
사실 유감스럽게도
나의 첫 응급실 행의 기억은, 아빠와 함께였다.
아빠는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계셨다.
하시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처가살이를 하게 된 아빠는,
큰 정신적 스트레스도 함께 견뎌내셔야 했다.
호탕하고 목소리도 시원시원한, 그래서 아빠를 닮은 외할머니와 달리
교사를 하시다 퇴직하신 외할아버지는 아빠와는 반대되는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분이셨다. 아빠가 곱게 보이지 않았는지 과일을 잔뜩 사들고 오거나 할 때도
기분이 좋지 않을 만한 얘기만 건네셨다.
사실 나는 그 시절 노래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그날도 아빠와 노래방을 갔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응급실에 가야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뇌졸중’이나 ‘뇌경색’으로 본인의 증상을 착각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검사해 본 결과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빠의 증상은 일종의 ‘공황장애’로 판명이 났다.
그런데 살면서 처음 겪는 응급실에서의 상황이 나는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엄마에게 전화로 울면서 통화를 했던 기억이 있었고,
그 이후로 ‘절대로 아빠와는 노래방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생각이 난다.
응급실은 그렇게 내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 곳이었다.
엄마는 다행히 한참을 기다렸다 소독을 하고, 드레싱을 했다.
그리고 파상풍 주사를 맞고, 또 항생제 3일 치를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잘려나간 손톱 부위가 손톱이 자라는 부위를 건드리지 않았는지
정형외과에서 확인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엄마는 ‘괜찮다’하시며 결국 집에서 셀프소독으로 새 살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계신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내년 액땜 했나 보다.’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몇 주 전 둘째 아이 열이 갑자기 39.5도까지 올라
‘응급실에 가야 하나’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었는데
응급실에 가보니 가봐도 별 게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대기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으니.
진료를 다 마치고 나오니,
12시가 넘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마치 영화처럼
예쁘게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