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아직 잠들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본지 몇 시간 째다. 이리저리 자세도 바꿔보고, 따듯한 물도 마셔보고, 심신을 편하게 해준다는 향도 피워 봤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침대 위, 창문 밖에서는 벌써 날이 밝아 오는지 이른 새벽부터 깬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이 다시 도진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안되겠다. 환기라도 시켜야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사실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오밀조밀 둘러 쌓인 주택가이기도 했고 집 앞에는 카센터가 있어 시끄럽기 그지없을뿐더러 하늘은 거미줄 같은 전봇대의 전선줄로 가려져 있었으니까.
선선한 새벽 공기가 창문을 너머 방으로 훌쩍 들어온다. 시원한 공기 탓일까, 조금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창틀에 턱을 괴고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밖을 괜스레 내다봤다.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새벽의 어스름한 푸른빛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번 별로라고 생각했던 풍경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도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지저분하다고 느끼던 하늘을 가린 못생긴 전선줄들이 음표가 달린 피아노 악보의 음줄처럼 보였던 건. 새벽바람에 흔들리는 전선, 아니 음줄을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삶이란 건 초심자의 행운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
초심자의 행운이란 이런 거다. (새로운 것을 처음 하게 될 때 뜻밖에 맞게 되는 행운이나 성공)
처음 시작하는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성공하는 것. 난생처음 낚시를 갔는데 베테랑보다 고기를 잘 잡는 일이라던지, 아무것도 모른 채 투자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대박이 났다던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생각해보니 이유는 딱 하나였다.
초심자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베테랑과는 다르다. 익숙하고 능숙해진 사람들은 뭔가를 하기 전에 생각하고 계획한다. 그리고 때론 망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초심자들은 다르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걱정을 할 여력도 없다. 어떻게 되든, 일단 해보자!라는 용기를 가지고 그 일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할 뿐이다. 그러기에 찾아오는 행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오늘을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면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일 잘하네.”라는 소리를 꽤나 듣곤 했다. 답답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업무처리가 빠르기도 했고 쉬더라도 일을 다 끝내 놓고 쉬자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일이 익숙해지고, 어느새 이것이 나의 일상으로 스며들었을 때, 나는 갇힌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랑에 있어서도 다를 건 없었다. 처음의 설렘이 사라지고 내 곁에 당신이 있는 것이, 같이 보내는 시간들이 곧, 당신과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 나는 내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당신이 있어 하지 못한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먼저 상처 받을까 봐, 버림받을까 봐, 사랑이 식어 버릴까봐 걱정했다. 결국 나는 그 모든 상황이 오기 전에 먼저 뒤돌아섰다. ‘이렇게 지내는건 사랑이 아니야.’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촉박한 일정 탓에 매 시간이 아까울테니까. 하지만 꽤 긴 일정의 여행이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여행지라고 하기보단 이미 내가 사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한 이곳이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일일이 찾아야만 탈 수 있던 대중교통도 어느덧 찾아보지 않고도 탈 수 있게 되고, 근처 카페 주인과는 인사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웬만한 곳은 구경도 다 한 것 같다. 떠나온 의미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을 찾아왔건만 다시 이곳은 내가 원래 있던 곳과 다를 것이 없어졌다. ‘이젠 지겨워, 돌아가야겠어.’
참 마음이 빨리도 변한다며 질책할지도 모르겠다.
참 의지도 없고 참을성도 없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비난하고 질책한데도 반박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마음이 빨리 변하는 것도, 변덕이 심한 것도, 의지도 참을성도 부족한 것도 맞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간이 주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이나 사랑, 여행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건 아니다.
시간에 의해 무감각해진 내가 있었을 뿐.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사랑이 끝나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여행을 마치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결국 나는 "그때가 좋았었어."라고 말한다.
그땐 몰랐다. 이렇게 내가 그 일을 좋아했었는지,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었는지, 그곳을 마음에 깊이 담아 두었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매번 처음처럼만 할 수 있다면 인생에 후회는 없겠지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걸 안다. 시간은 많은걸 무뎌지게 만들고, 익숙함은 지겨움을 가장해 내 눈을 가려버리고 마니까.
그래도 모든 것에 진심인 사람이 되고 싶다.
매번 뒤늦게 후회해도 괜찮으니까 좋아했었다는 걸, 사랑했었다는 걸, 마음에 깊이 두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다만, 시간이 주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들을 더는 놓쳐버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