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고래

1부: 말하지 못한 마음들 (나와의 시간을 쌓는 법)

by 비니루



‘아빠, 오늘도 할 일이 없어요?’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금세공사인 아버지는 집에 주로 있었어요. 아직 학교 가기 전인 저희 남매는 어머니의 화장품 방문판매와 조부모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죠.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2월, 저는 아직도 책가방을 사지 못했어요. 분명히 엄마가 백화점 가서 갖고 싶은 걸 사준다고 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질지 모르겠더라고요.


당분간은 유치원 가방을 메고 가는 상상까지 했던 저는, 이런 상황을 학장동 집 근처 친구들에게 털어놓았어요. 한 친구는 자기는 이미 키가 초등학생만큼 커서 또래보다 성숙미를 뽐냈고, 그런 오해를 받는다고 고백했죠. 그녀의 얼굴을 보니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어요. 떼를 써야 할 것 같았죠. 떼쓰기는 어린이날 말고는 써본 적이 없어 같은 연립주택에 사는 이모들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어요. 먼저 옆집에 사는 막내 이모한테 갔는데, 뜻밖의 소식을 들었어요.


‘은빈이 할아버지가 진해에 매표소 장사를 해서 너네 학교 보내준대, 입학지원금도 주시고.’


막내 이모는 어린 저에게 쉬운 어른말을 전해주는 이모였어요. 학장동을 떠난다는 선택이 있는지 몰랐던 저는 진해에 관해서 물어보기 시작했죠. 어린 시절 다대포와 해운대, 용두산공원이 저의 유년 시절을 지켜주던 장소들이었는데, 진해라니?


둘째 이모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저만의 개그맨이었던 그에게 물어보면 무엇이든 알기 쉽게 이야기해줄 것 같았거든요. 해군 기초 훈련을 하고 예전에는 이순신 장군이 멋지게 전투를 했던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어요.

불안은 현실이었어요. 어린 저에게도 그 무게는 느껴졌죠. 진해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뜻밖의 소식은 저의 작은 세상을 흔들었어요. 바다. 그 한마디에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부드럽게 흘러갔어요.


바다.


그 한 마디에 이곳저곳 쉬운 설명을 듣고 싶었던 제 마음이 조금은 부드럽게 흘렀어요. 그렇게 저의 마음은 안정됐지만, 우리 엄마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죠. 도시에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한몫했어요. 그렇게 일감이 줄어드는 아빠의 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새로운 거처와 직업을 제시해주시던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이들 교육에 힘쓰고 싶은 엄마의 물리적, 심리적 첨예한 갈등이 있었나 봐요. 그때마다 저는 동네 이모들에게 맡겨졌고 가끔은 잘 때 오줌을 이불에 싸기도 했어요. 제 안의 막연한 불안이 종종 새어 나오기도 했죠.


‘찰칵’


이사가기 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부산을 즐기기로 계획했어요. 사실 우리가족만 가는 여행은 한 번도 없었어요.


‘누나 이거 고래 같지?’ ‘엄마 여기 귀여운 동물 닮은 돌이 많아’


우리의 첫 가족여행은 태종대 자갈밭에서 시작되었어요. 돌과 마찰하는 파도 소리가 매우 사나웠죠. 유독 자갈밭 바다를 좋아했던 저는, 그 소리가 무서우면서도 좋았어요. 새우깡을 사 들고 유람선에 올랐지만 엄마와 남동생은 멀미를 시작했어요.


그때였어요. 검푸른 바다에서 작은 돌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며 유람선보다 더 빨리 헤엄쳐 가는 돌고래 떼를 발견한 것은.


“돌고래를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 우리 이사 가면 잘 풀릴 거야.”


어머니의 그 한 마디에 저는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을 잘했어요. 두 반 합쳐 한 학년에 70명이 다니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전교 2등을 했고, 우정상도 받고, 제가 쓴 동시로 장려상도 받았죠. 부산에서 공부했던 일 년은 글을 잘 모르는 아이로 나머지 보충학습을 받았었는데, 큰 발전이었어요.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제 안의 낙천성을 흘러나오게 했던 거예요.


그날, 돌고래는 오롯이 저만의 행운이었어요. 동생보다 제가 먼저 발견한 비밀. 이사 가는 진해에서는 제가 할아버지의 보물 1호가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마음속에서 부풀었죠.


유람선에 내려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저희 남매는 어렸어요. 아버지가 유명한 '길치'인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기도 해요. 같은 부산을 이동하는 데 4시간이 걸린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태종대 다누리 열차를 탔어요.

모녀상이라는 곳에 내렸는데 아까보다 파도 소리가 더 커졌죠.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빼꼼히 관찰하는 중이었는데 어머니가 자살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여기 파도 소리가 사람 비명 같다고 해서 자살바위라고 하기도 하고, 관광지로 되기 전에 자살하러 많이 와서 자살바위라고도 하는데 모녀상이 지켜주니깐 무서워하지 마.’


자연에 순응하며 잠자는 듯이 죽는 게 제가 알고 있는 죽음이었는데, 자살이라니. 새로운 개념의 용어였어요. 아무튼, 그 바위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을 거로 생각했죠.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이 편안하길 바라며 기차를 타고 그곳을 벗어났어요.


그때부터였을까요. 제 마음속에 막연한 불안과 함께 고래 한 마리가 자라기 시작했어요.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어야 하거나, 큰 소리로 부부싸움을 목격한 날이면 몰래 금요일 밤 KBS에서 방영한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4주 후에 뵙겠습니다’가 우리 집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상상하며 꿈속에서도 불안을 마주하곤 했죠.


그때의 밤은 심해에서 울음소리 내는 고래 같았어요. 제 안의 모습 그대로였죠. 그리고 낮의 시간이면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저의 모습이 더해졌어요.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오면 행운이라고 불리는 고래. 그런 존재가 제가 추구하는 가치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고래의 모습이 제 마음속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죠. 저는 타인에게 밝은 면을 보이며 행운을 주는 존재이고 싶었어요. 저의 두 모습이었답니다.


저는 특히 할아버지에게 제일 소중한 존재이고 싶었어요. 한자도 많이 아시고 6.25 한국전쟁에서 공군으로 참전한 용사시기도 하거든요. 멋지죠!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옛이야기가 큰 재미였어요. 그 할아버지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싶었던 우리 할아버지는 저보다 남동생에게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나누고 살갖을 맞대며 포옹을 하곤 했어요. 그런 아쉬움이 들면 저는 제가 받고 싶은 사랑의 형태를 먼저 표현했어요.


예를 들자면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서 인사해야 하는 상황이면, 저를 제일 먼저 반겨주는 할머니에게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곤 했죠. 먼저 포옹도 하고 선물과 감사와 안부의 손편지를 드렸어요.

그런 얕은 차별 속에서 저는 돌고래를 먼저 본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돌고래가 마치 저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번에는 동생보다 제가 먼저 행운을 찾았으니, 이사 가는 진해 집에서는 제가 보물 1호가 되고 싶었다는 소망이었던 것 같아요. 저기 아버지가 오시네요. 뒤늦게 달려온 아빠는 태종대 폐장 시간에 맞춰왔기 때문에, 저희는 아빠를 보자마자 내려가야 했어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라는 캠페인 글자를 읽는 저와 함께 말이죠.


‘아빠, 기저귀는 땅에서 100년 동안 안 썩는데요!’ ‘엄마랑 민호는 유람선 타고 멀미했어요!’


미주알고주알 쫑알거리는 저의 보고로 아빠는 압축된 가족 여행기를 즐기셨어요.

초여름, 공식적인 첫 가족여행의 기록은 그렇게 좋은 기분의 대화로 끝났답니다.


아까 고래이야기 기억하시죠? 고래는 숨 쉬러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해요. 생태학적으로는 바다에 사는 데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도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는 포유류로서의 삶을 아주 잘 살아내고 있죠.

저는 그 고래를 저 자신처럼 느꼈어요. 대학 전공으로 밥벌이를 하며 전문가라는 타이틀, 커리어우먼이라는 이름 아래 저는 늘 부단히 노력하기에 바빴거든요. 진짜 전문가는 꾸준히, 깊이 있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걸 그땐 몰랐어요.


저는 마치 선무당처럼 덤볐죠. 모든 사례의 미래를 점치듯 확언을 내리기도 했어요. 그게 누군가에겐 위로였겠지만, 저 자신에게는 서서히 저를 침몰시키는 불안이었어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것 같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마음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답니다. 고래가 죽으면 몇십 톤의 이산화탄소를 가지고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문득, 저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 전문가가 아닌 선생님으로, 작지만 즐거운 기억으로 사라지고 싶었어요. 죽음을 생각한 순간, 오히려 제 안의 숨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어요.


고래처럼.

이 깊은 물속에서, 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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