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에서 바다로

1부: 말하지 못한 마음들 (나와의 시간을 쌓는 법)

by 비니루

부산이라는 대도시는 어린이였던 저에게 대중교통을 타고 한 시간이 넘어도 끝이 닿지 않는 수심 깊은 곳 같았어요. 그런 제가 처음으로 세상의 크기를 실감한 것은 진해로 이사하면서부터였죠.

진해는 대중교통으로 40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도착할 수 있는 소도시였어요. 부산에서 진해로, 물리적인 공간이 작아진 만큼 저의 세상도 졸아드는 기분이었죠. 진해는 대중교통을 타고 한 시간이면 다른 도시에 다다르는,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아담한 곳이었어요.


대도시의 익명성은 이곳 진해에서 ‘부산 매표소집 딸내미’라는 투명한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대도시의 번잡함이 피곤했던 저에게, 작은 도시의 고요함이 늘 편안했던 것만은 아니었어요. 간밤에 있었던 일이 사흘 안에 동네 전체에 퍼지는 시골살이와 같았거든요.


저녁마다 들려오는 부모님의 다툼 소리는 그 투명한 이름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저를 옥죄었어요. 엄마는 힘든 날이면 추억이 담긴 필름 사진첩을 가위와 칼로 난도질했어요. 제 추억도 훼손되는 것 같았죠. 그것은 마치 탁 트인 바다에서 유영하다가, 사방이 막힌 웅덩이에 갇힌 기분이었어요.


진해에 처음 내려왔을 때, 부모님은 낯선 곳에서의 정착에 모든 것을 매달려야 했어요.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은 간이역 매표소에서 부산 가는 직행 버스표를 팔며 우리 네 가족의 젊은 날은 쉴 틈 없이 달렸죠.

초반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3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며 아버지를 도우셨어요. 할아버지는 1평 남짓한 매표소의 운영과 회계를, 할머니는 식사와 돌봄을 맡으셨죠. 아버지는 그 모든 업무를 배우는 데 남들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렸어요. 그저 가게와 10분 거리의 집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가족들은 칭찬을 주고받았어요. 저 또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어요.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어머니 생신상에 직접 소고기미역국을 끓여 올렸죠. '인생 최대의 효도'라는 칭찬을 들었던 그 날의 기억은, 낯선 곳에서 제가 처음으로 단단하게 디딘 발자국이었어요.


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증폭하는 불안은 저를 작은 도시에 가두었어요. 저녁마다 인사동 단독주택에서는 우당탕 물건 던지는 소리가 났어요.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라며, 그날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부모님은 다투셨고, 유난히 예민했던 저는 새벽에 자주 잠을 깼어요.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좌판에 놓인 신문을 읽으며 칼럼을 익히셨어요. 자식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죠.


훗날 그 마음 덕분이었을까요, 저는 대학 입시에서 신문 칼럼에 대한 면접을 볼 기회를 얻었어요. 하지만 ‘매표소집 딸내미’의 이야기에 면접관들의 반응은 미미했죠. 저의 세상은 여전히 진해라는 웅덩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렇게 정체되어 있던 우리 집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은 의외로 남동생이었어요. 어린 시절 돌 위에 훌쩍 올라서던 아이는 커서 학교 담벼락을 넘었고, 원동기 위에 올라타 자신의 길을 갔죠. 그는 어디든 잘 올라탔어요.


2014년 윤일병 사건[1] 이후로 조금은 너그러워진 군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최전방 철원에서 군 복무를 하던 동생은 군 동기들의 가족 사랑에 제대로 감염된 듯했죠. 하루는 부대 체육대회에 엄마와 제가 진해에서 철원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어요. 그곳에서 동생은 제대 후의 소원을 말했어요.


“엄마, 아빠. 리마인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에 가요.”


그 한마디는 한동안 우리 집 최고의 소통 창구가 되었어요. 막내의 소원에 따라, 평생 휴가 한번 제대로 내 본 적 없던 부모님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사이 저는 제법 이 집의 가장 같은 아이로 성장해 있었어요. 어머니의 소원대로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전공을 살려 2년째 밥벌이를 했고, 이 여행의 경비를 대부분 부담하는 책임감 있는 아이로 자랐답니다.


첫 가족여행 이후 16년, 고여있던 물이 마침내 다른 바다를 향해 흘러갈 채비를 하고 있었어요.


“수국이 한드러지게 피었다.”


엄마의 갤럭시 스마트폰이 제주의 풍경을 쉴 새 없이 담아냈다. ‘한드러지게’가 사투리인지는 몰라도,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나는 엄마의 감탄에 맞춰 렌터카를 세우고 출발하기를 반복한다. 숙소 근처 종달리 수국길, 성인 남자 키만큼 자란 수국이 좁은 찻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는 길 중간중간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부모님은 ‘리마인드 신혼여행’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게 첫 장을 기록했고, 우리 남매가 ‘짠’하고 태어난 것처럼 등장하는 자세를 이번 여행의 시그니처로 정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반복 끝에 엄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길을 운전하며 우리 가족의 지나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2015년 6월, 해무가 가득한 제주에서 우리의 두 번째 가족여행이 시작됐다. 초보 운전자인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앞차의 비상등에 의지해 겨우 운전대를 잡았다. 불안한 시작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첫 가족여행 때처럼, 이번에도 돌고래가 우리를 지켜줄 거야.’


그 믿음 덕분이었을까. 우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우리는 정말로 헤엄치는 돌고래 떼를 만났다. 10분이 넘도록, 푸른 바다 위를 힘차게 뛰어오르는 돌고래들의 유영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 자유로운 몸짓이 마치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변화될 우리들의 모습도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나는 응축된 진해에서 고여있던 어린 마음을 흘려보내고, 그곳에서 얻은 평온함으로 새로운 출발을 꿈꿀 수 있었다.


"만호야, 우리 태종대에서 본 돌고래 기억나나? 제주 돌고래는 네 제대를 축하해주나 보다.”

16년 만에 다시 찾아온 돌고래의 행운을 온 가족이 함께 만끽했다. 90년대의 제주와 2010년대의 제주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 여행이 남긴 파문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개인 자동차 보급이 늘면서 간이역의 차표 손님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제주의 넘실거리는 바다를 마음에 담아온 나는 3년간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부산에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했다. 진해라는 웅덩이를 벗어나 나만의 바다로 나아갈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와 동생이 부산에 자리를 잡자, 부모님의 발걸음도 잦아졌다. 건강검진을 핑계로, 시술을 이유로 감만동 딸네 집을 들르는 날이 분기마다 한 번씩으로 늘어났다. 22년간 쉼 없이 달려온 부모님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다. 결국, 부산 사는 남매의 성원에 못 이겨 두 분은 정들었던 매표소와의 작별을 결심했다. 마침내 간이역이 철거되던 날, 22년의 세월도 함께 막을 내렸다.


고여있던 물이 마침내 새로운 방향을 찾아 흐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 2014년 군대 내 가혹행위와 폭행으로 병사가 사망한 사건으로, 군 인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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