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레인줄 착각하고 있는 하얀 뚜밥의 이야기
2015년 10월 31일
우리는 가져서 행복한 게 아니라, 가져서 행복하지 못한 것 같다. 전기를 쓰다가 모잘라 멀티탭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버거운 전기세에 허덕이며 일을 한다. 편하게 어디서든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드폰이라는 것이 생겼고, 하루가 다르게 나오는 신제품에 그리고 요금에 버거워한다. 또 핸드폰이라는 것에 구속을 당하며 어디서든 전화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흥청망청 소비를 했던 세네갈 밖에서의 삶은 나를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또 그것이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의미한 소비 속에서 허무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보다 더 못 산다는 최빈국인, 이곳에서 이들은 매일 웃고 함께하고 함께 수다 떨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한다. 나는 아마도 행복을 찾아 세네갈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왜 우리는 그곳에서 그렇게 눈치를 보며 빈껍데기 같은 소비를 하며 또 그 빈껍데기를 위한 소비를 했어야만 했는지. 가치 있는 소비는 무엇인지. 없어도 행복하다는 나의 주장이 이곳에서는 확실히도 성립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코이카 규정상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위험한 빌라지나 깊은곳으로는 접근이 조금은 힘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분별한 개발이 나를 허무하게 만든 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리도 열심히 쫓고 쫓아 이곳 최빈국, 세네갈까지 오게 된 것일까.
어느덧 이곳에 온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때때로 당황스러운 일도 만만치 않게 많고 또 힘든 일도 물론 있었던 것 같다. 문득 6개월 전 이곳에서 와 쓰기 시작했던 일기를 펼쳐본다. 나에겐 꽤나 큰 착각도 있었고 조금의 오만도 있었다. 또 가장 무서운 선입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위 내용은 내가 10월 31일. 세네갈에 도착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홈스테이 집에서 썼던 일기다. 평소에는 이렇게나 많이 접하지 못했던 흑인들의 무리에 덩그러니 놓여진것 같기도 했고, 조금은 긴장이 풀리지 않아 무섭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이야 내 피부색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흑인이 된것마냥 백인들을 보면 "뚜밥"하고 놀리고 싶은 충동도 간혹 생긴다. 뚜밥은 백인을 조롱하거나 놀리듯 쓰는 용어인데 생각해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도 백인을 보면 양키라고 놀리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내가 많이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격분하기도 했고 나와 다른 문화로 답답해 화를 내기도 했던 지난 6개월이었다. 그런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가려고 한다.
대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까,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4인 1실이었던 우리 학교 기숙사에는 나를 포함해 4명의 여자아이들과 방을 같이 쓸 수 있었다. 게 중 한 아이가 탄자니아에서 온 아이 었다. 부모님께서 선교사로 계셨고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내게 커피를 내밀며
"언니 이건 탄자니아에서 가져온 커피예요. 언니 커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드려요"
하고 그 아이는 아프리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아이의 삶이었기 때문에 엄청 특별한 이야기도 설레는 여행 이야기도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에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드림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대학 4년제를 다닌다는 나는 흔히들 알고 있는 탄자니아, 케냐 이것이 아프리카 대륙의 전부인 줄 알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이 진행되고 아 그런 나라도 있구나. 정도였던 것 같다. 흑인은 모두 미국 사람이거나 아프리카 사람인 줄 알았다. 뉴욕에서 만난 흑인 프랑스인에게 왜 너는 영어를 못하냐고 다그쳤으니. 무슨말이 더 필요하랴. 그리고 왜 미국에 흑인이 많고 아프리카에 많은지 역사적으로 생각해볼 결흘조차 없었다고 변명해본다. 그리고 비단 나의 문제만은 아니라 생각이 든다. 때때로 이들은 나 같은 동양인을 보면 '시노와'라며 중국인을 칭한다. 어떤 꼬맹이들은 '칭총'이라며 중국인을 조롱하듯 부르기도 한다. 더욱이 신기한 건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아직 중국인을 만나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시노와라고 불려야 하나 깊은 고민을 했다. 이유는 참 별게 없더라. 1월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장례식 참석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었다. 그 때 우연히 TV 한 프로에서 콩고사람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콩고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어!? 와 신기하다 세네갈에도 저 비슷한 요리가 있어!"
라고 했더니 동생이 말한다.
"그렇겠지 다 같은 아프리카잖아."
그 순간 내가 시노와라고 불려야만 했던 이유를 확실하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네갈에서 내가 시노와라고 불리기 전에 나의 국적을 물어야 한다며 시노와라고 말하는 사람들 일일이 붙잡고 설명했듯 동생을 붙잡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모두 같다고 너보고 중국인!이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 다 같은 거야?"
라고 했더니 동생은 그 순간 "아.."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네갈에 돌아와서도 조금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노와라고 하는 순간 나는 붙잡고 오늘도 설명한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사는 이보리안과 세네갈에서 사는 세네갈레와 이티오피아에 사는 이티오피안이 모두 같은 사람이야? 같은 얼굴이라도 다 다른 국적이잖아! 나도 그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중국과 한국 일본은 모두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사람들이야. 나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보면 시노와!라고 부르기 전에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줘. 부탁이야"
그리고 그 뒤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코레안!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