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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May 14. 2016

스물아홉, 딸이 생겼다.

그리고 엄마가 만난 세네갈래

  




       내 나이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그리고 딸이 생겼다. 무려 20살짜리 딸이 생겼다. 지난 글에서 아이들과 대판 했었던 이야기를 썼다. 내가 이곳으로 발령받기 전 학교 천장이 무너졌고 올 초에 그 공사가 시작되어 드디어 실습실 사용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전기도 통하지 않고 삭막했던 학교 밖 어떤 공간(?)에서 진행되었던 수업이 드디어 실습실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월요일, 수업 준비를 위해 출근을 했더니 아이들이 새로운 실습실을 청소하느라 꽤 분주하다. 그리고 웬일인지


"마담, 봉쥬르"


        애들이 꽤 공손해졌다. 매번 "싸바?빈따?"였던 아이들이 마담이라고 제대로 호칭을 하고 말투 자체가 싹 바뀌어버린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이 있어서 이렇게 공손 해진 것인지 꽤나 당황스럽다.  그리고 새로운 실습실에서 수업할 생각에 괜스레 설레기도 하고 떨린다. 내가 새로 사 온 오븐도 실습실에 들리고 레스토랑으로 쓰려했던 공간은 교실 부족으로 결국 실습실로 탈바꿈되어버렸다. 2층에 빈공터처럼 쓰이던 공간도 교실로 탈바꿈되었고 학교가 꽤- 활기가 넘친다. 다음날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수업에 10분 정도 늦었는데 아이들이 교무실에 찾아가 내가 오지 않는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난주 수업을 하지 않겠다는 엄포가 꽤나 크게 영향을 끼쳤나 보다. 이 날 우리는 쿠키를 했다. 딸기잼 쿠키로 학교 안에서 수업을 하니 너도나도 사겠다며 미리 예약을 걸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내 수업의 학생들 학생들 중 초반에 꽤 속도면이나 제품면에서 많이 뒷쳐지는 아이가 있었다. 똑똑한 것 같은데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요즘 내 수업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다. 제품 완성도도 좋고 반죽도 꽤 만족스러운 정도이다. 그 아이가 문득 이렇게 말한다.


"마담, 너는 내 엄마야"


... 응? 당황스러움에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그랬더니 또 그새 말을 바꾼다.


"마담, 너는 내 큰언니야"


그래서 나도 물었다. 내가 왜 너의 엄마냐고- 그랬더니 그냥 나는 본인의 엄마란다. 그러면서 뒤에 붙이는 말이 더 웃기다.


"그래서 말인데.. 엄마, 나 빵 하나만 사주면 안 돼?"



이 녀석! 목적은 바로 빵이었다. 빵을 안 사줘도 나는 너의 엄마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나에게 '엄마'라고 했다. 처음 듣는 그 호칭이 참으로 낯설고도 기분이 묘하다. 끝까지 빵을 사주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끝까지 '너는 내 엄마야'라고 한다. 그리고 이 날 수업이 끝나고 그녀의 두 손 모아 고개 숙이며 하는 한국어 한마디에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고맙습니다"



   처음에 이곳 세네갈에 와서 익숙지 않았던 것은 홈스테이 마마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 듯 나는 꽤 많은 엄마와 아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었던 이유는 내가 정말 그들의 가족으로써 흡수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남이지만 가까운 딸이 아닌 정말 본인의 딸로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께베메르에 이사를 하던 날 엄마는 띠에스 길목에서 야채 꾸러미를 내게 전해줬다. 훨씬 시골로 이사 가는 내게 그곳은 야채가 비쌀 것이라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집에 가면 엄마는 매번 내 야채값 걱정에 매번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갈 때마다 엄마는 작은 선물을 하나씩 내게 주곤 하고 그저 나를 돈벌이 수단이 아닌 정말 가족으로써 받아들여주는 그녀의 따듯함에 이곳 세네갈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또, 어디를 가던 나이가 조금 있는 마담들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너는 내 딸이야"


라곤한다. 덕분에 나는 세네갈에서만 엄청 많은 엄마를 두게 된 셈이다.  이곳 세네갈은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고 그 부인들의 자식들은 정말 친 형제로써 우애가 좋은 편이다. 또 각 부인들도 다른 부인의 자식을 친 자식으로서 받아들이는 모습이 꽤 생소했다. 내 친구 S양도 어머니가 두 분이다. 나는 그 어머니 두 분과 다른 어머니의 할머니까지 뵐 수 있었다. 처음에 어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그녀가 친어머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다른 어머니가 친어머니 었던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으로 어우러져 지내는 모습이 나의 가치관으로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친어머니와 양어머니의 구분이 없이 정말 어머니로 모시는 내 친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어떠한 학문이나 학술적으로도 증명된 것이 아닌 순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이곳 세네갈은 남편에 의해 여럿 부인과 어우러져 살아야 했고 그의 자식들은 모두 본인의 자식으로서 받아 들어야만 했다. 물론 질투도 나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삶의 운명으로써 받아들이고 살게 된 것이다. 한국처럼 내 자식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울타리 속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자식으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최빈국이지만 의외였던 점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러 다니는 딸리베들이 굶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할당량만큼 구걸을 해오지 않으면 구타를 당하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지 이 곳 사람들의 관습인지 음식을 항상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아침에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바게트 빵을 사 먹고 있으면 주인아줌마는 딸리베들에게 음식들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종종 봤다. 또 현지인들은 대가족인 이유 때문인지 식사 준비를 넉넉하게 해서 음식이 남을 정도로 많이 한다. 물론 그 덕분에 언제든 손님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고 현지인들이 밥을 먹고 가라고 하는 날이면 서스름없이 돗자리에 앉게 된다. 또 그렇게 하고서도 음식이 남으면 딸리베에게 오라고 해 음식을 나누어준다. 음식을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로 남는 음식이 별로 없다. 타인을 자식으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세네갈 마담들, 그런 이유로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임에 이질감이 없었던 걸까? 홈스테이를 끝나고도 얼마 전 엄마한테 띠에스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고 싶은데 집에 가도 돼요?라는 말에 엄마는 말한다.



빈따, 너는 내 딸인데 왜 안 되겠니? 어서 오렴








     며칠 전 엄마한테서 카톡이 왔다. 대구에서 한 세네갈래를 만났었다고 한다. 그는 세네갈래였고 그의 와이프는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그것도 작은 도시 대구에서! 세네갈래를 엄마가 만났다고 하니 신기하고 다시 한번 신기했다. 그의 직업은 옷을 만드는 일이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정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고 한다. 엄마는 반가운 마음에 큰 딸이 세네갈에서 봉사활동 중이고 께베메르에서 살고 있다며 사진을 보여줬다고 한다. 어땠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참 다정다감한 사람이더라'


라며 남편이 아이를 계속 케어하고 있고 와이프는 밥만 먹고 있더란다. 남편이 아이를 밥 먹이고 케어를 한다니, 이곳 세네갈에서는 아직 나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내가 지난 시간 세네갈에서 본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참 다정하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걸고 매너가 좋다. 하지만 꽤나 가부장적이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이 있고 남성이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 하루는 내가 힘자랑하느라 A4지 한 박스를 들고 나르는데 나의 코워커 무슈 은자이가


'빈따! 그렇게 무거운 건 남자들이 드는 거야! 네가 할 일이 아니야!'


  사랑스럽게 나의 A4 박스를 들고 가버렸다. 힘쓰는 일은 대체로 남성이 하고 또 여성들은 밥을 하고 아이들과 집안을 케어하는 일로 일의 분담이 꽤 나누어져 있다. 근데 우리 엄마가 만난 세네갈 남성은 아이 밥을 먹이고 아이가 칭얼대자 아이를 돌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무슬림인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의 한국인 와이프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엄마는 이미 그들과 헤어진 상태였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세네갈래가 있듯 이곳 밖의 세상에도 세네갈래가 참 많은가 보다. 내가 만나온 세네갈래들은 세네갈 요리만을 사랑하고 또 꼭 먹어야 한다. 외지 요리에 대해 매우 두려움도 크다. 아마도 종교문제도 있을 테다. 먹을 수 없는 게 많기 때문에 한국요리를 권했을 때 머뭇거리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들을 하며 그 사람 참 세네갈 그립겠다는 말을 했다. 한국에서는 세네갈 식당을 본 적조차 없고 그는 어떻게 세네갈 요리에 대한 향수를 없앨까 하는 아련한 안타까움? 혹은 아련함으로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말한다.


"그 사람 청국장 참 맛있게도 먹더라 "


이후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남자애들이 있으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근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도 이 이야기에 놀라워하고 신기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말해준다.


"그러니 너네도 한번 잘 찾아봐! 나는 이미 결혼했으니 안될 것 같아! 미안해!"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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