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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May 18. 2016

Fallin' in love

은다라에 울려 퍼지는 달빛 아래 향연


            은다라는 생루이의 옛지명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st.louis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옛 월로프어로는 'Ndar' 은다라다. 훨씬 이쁜 이름을 가지고도 생루이라는 이름을 불려야 하는 현실이 잔혹하기도 하고 씁쓸하다. 심지어 수도였던 생루이는 군 물자 수송이 훨씬 편리하고 유용한 다카르가 수도로 바뀌어 옛 수도로, 옛 유럽 시가지의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있다. 24년째 은다라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의 향연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5월 11일부터 16일까지는 은다라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지난 두 달 전쯤, 생루이 재즈 페스티벌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이곳은 꼭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일정상 모든 페스티벌은 참여하지 못하고 주말과 연휴를 통해 오게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께베메르에서 생루이까지는 약 한 시간 반. 하지만 앞서 항상 말을 했듯 우리 동네에는 차가 없다.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한 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쉬엄쉬엄 가는 버스를 타고서 몇 시간 만에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카르에서 올라오는 용일 오빠의 차를 기다리기로 한다. 웬일인지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 띠에스도 도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가무'라는 명절? 에 해당하는 날이란다. 한마디로 민족 대이동의 기간에 딱! 하고 걸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약 4시간을 기다려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장시간 운전대를 잡은 용일 오빠도, 슬기도, 지은이도, 민영이도 모두 지친 마음에 우리 집을 들어선다. 오기 전 출출할까 걱정돼 해 둔 맥반석 계란과 망고를 썰어주며 지친 심신을 달래 준다.  그리곤 우리는 생루이로 향했다.


다카에서 출발하면 다섯 시간이면 갈 거리를  9시간이 지나서야 생루이에 도착했다. 결국 우리는 금요일 공연을 포기하고 토요일 공연을 보기로 했다. 토요일 낮, 요 며칠 유난히 현지식이 그립고 먹고 싶었다. 다행인지 모두 현지식을 먹는 것에 동의했고 우리는 현지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게 밥을 먹으려던 찬라, 한 현지인이 와서 암표를 팔 기 시작한다. 본인은 이곳 가이드(?), 관광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인데 초대권을 갖게 되었고 본인은 필요가 없기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이 티켓을 팔고자 한다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구매를 해볼 만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총 10명이고 10장을 구해온다면 티켓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알겠다며 번호를 받아갔고 우리를 유유히 떠나갔다.


한참 지났을까, 우리는 기념품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었고 그는 돌아왔다. 그리곤 다 같이 빵-하고 터져 웃음이 나왔다.





그가 구해온 티켓이 바로 뮤지션, 기술자, 언론사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언론사, 피아노를 전공한 B양은 뮤지션, 그리고 누군가를 기술자를 해야 하냐며 한참을 웃었다. 우리는 이것은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고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이것을 건넸다. 결국 우리는 총 10장을 가져오지 않으면 정식으로 티켓을 구매하겠다며 그를 다시 돌려보냈다. 해 질 무렵 그는 결국 다시 티켓을 가지고 왔고 우리는 10장을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암표를 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나, 삶이 고단한 현지인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 후 우리는 저 뮤지션과 테크니션, 언론사의 명찰을 달고 입장하는 관객을 여럿 볼 수 있었다.





*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모모두,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아민, 그리고 첫 번째 생루이 재즈 페스티벌의 포스터.

* 벽에 쭉 전시되어있는 재즈 페스티벌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설명해주는 Marius아저씨, 설명 듣고 있는 아민과 딴짓하느라 바쁜 모모

*마리우스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모두와 아민, 마마두가 소개한 로컬 시장 깊은 곳 쩨부젼 맛집



            이번에 우연히도 모로코에서 여행 온 아민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또 일정이 비슷해 생루이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가 머물고 있는 그의 카우치서핑 호스트 모모두까지 알게 되었다. 모모두는 생루이에서 태어나 생루이에서 쭉- 살고 있다고 한다. 내가 요 며칠 먹고 싶었던 쩨부젼 맛집을 소개로 생루이 투어가 시작되었다. 길을 한참 걷다 보니 길거리에 액자가 많이도 걸려 있다. 무언가 보니 재즈 페스티벌의 역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재즈 페스티벌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도슨트 같은 마리우스 아저씨의 설명이 시작된다. 불어가 많이 약한 나는 아민이 불어로 설명을 듣고 내게 영어로 다시 설명해 줬다. 1991년에 시작된 생루이 재즈 페스티벌은 당시에는 3일만 진행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3일 동안 매일 24시간 즉, 3일간 잠시도 쉬지 않고 45개의 밴드가 공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어보니 정말 아침에도, 밤에도, 오후에도 쉬지 않고 공연장은 운영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재즈에 열정적이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또 생루이에는 공항이 하나 있는데 그 공항은 군용 공항으로 민간인이 사용할 수 없는 공항이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뮤지션들이 다카르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면 다카르에서 생루이까지 프라이빗 비행기로 이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이 얼마나 재즈 페스티벌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재즈'하면 떠오르는 한 곡이 있다. 어릴 때 엄마가 자주 틀어주던 곡. 아침에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누가 연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색소폰과 피아노 소리로 잔잔하게 시작하던 Historia De Un Amor.  그래서인지 '재즈'라는 단어는 나에게 '엄마'를 상기시킨다. 나는 한없이 어렸지만 이 곡을 듣던 날씬하고 예쁜 엄마의 30대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10시쯤 공연장을 입장하니 비 온 다음 날 물줄기에 남은 물방울이 배웅이라도 하듯 톡톡  떨어지는 리듬들이 한창이다. 이렇게 개운하고 상큼할 수가 없다. 예전 뉴욕에서 빌리지 뱅가드라는 유명한 재즈바에 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재즈 리듬으로 시작하다가 나는 문화에 무지한 듯 결국 맥주에 취해 잠들어버렸다. 어릴 때 듣던 엄마의 재즈와 달리 너무 졸렸던 것이다.  옆에 앉은 피아노 아티스트이자 다카르 어느 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B양에게 물어보니 재즈도 장르가 매우 다양하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cheikh tidiane fall의 공연의 리듬이 유독 나를 기분 좋게 해주었는데 그 이유가 익숙한 리듬과 비트를 많이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연주 실력도 뛰어났고 색소폰 소리도 피아노 소리도 주말 아침 맑은 공기로 샤워를 한 듯 그렇게 개운했다. 나는 B양에게 계속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했던 것 같다.   토요일의 마지막팀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세네갈에 와서 29년을 살며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이곳에서는 가라솔, 영어로는 사워솝이라 불리는 과일과 쿠바 출신 Omar Sosa라는 이 뮤지션이다. B양의 말에 의하면 재작년쯤인가, 한국에서도 공연을 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티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았던 그 해가 한이 되고 너무 슬펐다. 오마르 소사의 등장에 온 몸에 전율이 울렸다. 내가 좋아하는 EDM의 비트도 들렸고 그의 피아노 연주도, 그리고 베이스도, 색소폰도, 드럼도 그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연주였다. 또 한참을 보다가 못 참겠다며 R양을 데리고 무대 쪽으로 나갔다. 사진을 찍기 위해 나갔던 것이 오마르 소사의 손짓에 앞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중앙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음주가무를 참 즐겨했다. 가무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쉬지 않고 흔들어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네갈에 와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한마디로 회포를 풀고 온 것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춤을 췄다. 그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춤을 추었던 그 순간이 어렴풋 필름이 끊긴 듯 아련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약에 취한 것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  함께 춤을 추던 다른 외국인 친구들, 그리고 오마르 소사와의 셀카를 찍기 위한 발악





        새벽 1시가 넘어야 공연이 끝났고 다 같이 '앙코르'를 외쳤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루이는 꽤 추운 편인데 겉옷을 벗고도 더워서 팔을 걷어올리며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 신나게 춤을 추고 즐긴 탓일까, 한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요청받았고 'Why not?'이라는 나의 말에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나는 웃음을 유도해 'Destiny'이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진지함에... 인터뷰는 당황스럽고 진지하게 끝났다고 한다. 하하 내년에 또 이만큼 즐거운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으면 좋겠다!






-cheikh tidiane fall팀의 공연 중 일부 

-Omar Sosa 팀의 공연 중 일부 



             공연장에는 세네갈의 외국인 반상회라도 하듯 외국인들이 정말로 많았다. 괜스레 이 페스티벌은 오로지 외국인과 부유한 현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현지인들은 공연장 밖 작은 무료 콘서트에 거의 참여를 하는 편이었다. 아마도 5000 세파라는 큰 돈을 지불하며 공연을 보는 것이 큰 부담이었을 테다. 그래서 현지인들에게 무료 티켓을 많이 나누어주었고 그 티켓은 다시 암표로 팔려나갔다. 나는 티켓을 살 당시에는 현지인들의 팍팍한 삶을 도와준다고 생각했고 그 티켓을 사주는 것이 그를 위함이자 나를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나는 그의 티켓을 사주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 티켓을 사주지 않았더라면 물론 어떤 다른 외국인이 그 티켓을 구매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친구에게 선물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 비슷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물론 또 이 재즈 페스티벌은 분명 세네갈의 경제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재즈 페스티벌 옆 큰 부스에서 박람회처럼 세네갈래들이 물건을 팔고 또 홍보도 한다. 꼭 야시장 같기도 하고 박람회 같기도 하다.


  모모두와 헤어질 때 나는 한국인 친구들과 수영을 하기로 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어디서 수영하냐는 말에 흠칫 망설여졌다. 한 호텔에서 친구가 묵고 있고 그곳에서 무료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지만 모모두의 함께 바다 수영하러 가자는 말에 괜스레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또 그날 저녁 나를 보기 위해 공연장 앞까지 온 그는 내게 다른 무료공연이 있는데 더 재미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이렇듯 나는 때때로 혼란이 올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의 친구지만 나의 어느 선까지 나를 버리고 그들과 동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있다. 가끔은 호텔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호텔에서 수영을 하기도 한다. 물론 내게도 비싸지만 가끔 그런 여가를 즐길 여유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나의 어떤 친구들은 그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밥을 먹으며 모모두가 했던 말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간다. 


돈은 중요하지 않아.
돈만 벌다가 내 삶을 찾을 때엔 나는 죽고 없을 거야.
그래, 물론 돈도 중요하지. 하지만 내 삶이 먼저야.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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