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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Sep 17. 2024

외눈토끼의 실업계 진학기

 벌써 20년 전이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 쉼 없이 수다를 떨고 나니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나는 다수의 두 눈 토끼 사이의 외눈토끼였다.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왜"하고 궁금해하며 더 나은 선택, 더 나은 조합이 없는지 궁금했다.


 나는 중학교 입학당시 반 배치고사 성적이 매우 좋았다. 여느 부모들이 그러하듯 우리 엄마도 나의 중학교생활의 시작이 걱정되었던 것 같다. 특히 '기본'이 무너지면 '시작'이 어렵다는 것을 아셨고, 그 부분만큼은 채워주려 노력하셨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집중하듯 실제로 중학교 학습은 어려웠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몰랐고 듣고 읽어도 기본지식이 없으니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당시 아주 짧게 기본기를 받쳐주기 위해 과외를 아주 잠깐 받았었는데, 과외 선생님에게 나는 " 왜 영어를 배워야 하죠?"라는 질문을 매 수업 때마다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당시엔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외국인도 많지 않았기에 영어를 배워야 하는 목적을 잘 몰랐고 목적의식이 없는 나는 수업을 따라가는 게 너무 힘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등수는 한자리에서 세 자릿수로 밀려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무언가를 정말 시작해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나마 답이 정해져 있고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학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수학 과외를 시작했고 수학 학원도 동시에 등록했다. 이 생활을 약 3달 정도 했던 것 같다. 다이어트를 시작할 땐 짧고 굵게 마음잡고 시작하듯, 나는 수학공부를 그렇게 했다. 방정식을 배우고 문제를 풀어 답을 맞히고 나니 공부가 재미있었다. 아니, 수학이 재미있었다. 왜 저건 답이 아닌지, 이것만 답인지 누구의 생각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고 확실해서 좋았다. 나는 아무래도 그때부터 평가자, 문제 출시자 등의 자격을 관찰하고 비판적 사고를 하는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세 달쯤 수학과외와 학원을 동시에 쏟아부었더니, 나의 수학성적은 거의 만점에 가까워졌다. 


 중학교 3학년, 아무리 수학성적이 올랐어도 전체적 성적은 처음 중학교 입학할 때처럼 오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공부는 점점 더 고난도로 바뀌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고등학교 공부는 더 걱정이 되어 왔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전을 짜야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로 돌아가, 대강당에 옹기종기 모여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회색 정장을 입고 오신 나이 지긋한 소방서 서장님인가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그분의 강연 내용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나의 뇌리에 박히는 내용이었다. 우리의 꿈을 물어보며 '꿈만'꾸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으면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며, 교대를 가기 위해선 어떤 성적을 받아야 하며 어떤 인성을 가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타임라인을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소방관이 되고 싶으면 어떤 육체적 준수사항이 있으며, 어떤 교육 수준 이어야 하고 어떻게 어떤 시험을 봐야 하는지 정말 구체적으로 조사하라는 강연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지만 10살 나는 꽤 신선한 강연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상에! 무언가를 되고 싶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하는구나!"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아야 내 수준을 알고 어떤 전략으로 학교를 갈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작은 학교에도 이미 내 앞엔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전국시험인 수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말, 나는 치트키를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요리학원 원장이었고 엄마는 제과점을 운영하셨었다. 이 두 곳 모두 대구농업고등학교(현 대구 마이스터교)와 연계되어 있었다. 요즘은 어떤 분위기인지 모르겠으나, 당시엔 실업계 고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대부분 중학교 성적이 매우 낮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선택이 사회에 대한 나의 시선을 밝게 해 준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성적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학생들을 평가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 마냥 평가절하되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성적이 낮아 실업계 고교를 진학한다면, 나는 사회에서 늘 뒷 순번에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틀을 꼭 깨버리고 싶었다. 


사회가 이야기하는 그 틀과 사람들의 생각을 깨어버리고 싶다는 작은 열정이 오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문득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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