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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Sep 19. 2024

비판적 사고의 양분

시간을 돌아보니 작은 활동 하나하나가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오늘은 나의 이러한 비판적 성향과 사고하는 방법들을 어떻게 습득했나 되돌아보려 한다. 


 엄만 제과점을 운영하셨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제과점으로 가셔서 자정이 되어야 문을 닫는 정말 장시간의 일을 하셨다. 그럼에도 내가 대화를 하고자 하면 새벽 두세 시 가끔은 네시까지도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이런 날이면 정말 몇 시간 잠을 청하지 못하고 일하러 가시는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엄마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건 사실 이 부분이다.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시작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저 들어만 주는 것이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반박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반박하여 내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의 근본을 찾기를 도와주셨다. 예를 들면, 그 사건은 어디서 시작됐는데? 그 사건은 누가 연계되었고 A의 입장에선 어떤데? 이런 대화들을 쉼 없이 나누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고해 보는 연습은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참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책의 종류에 상관없이 구매하고 읽을 권리가 있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선 돈을 많이 아꼈지만 책값은 늘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집 근처에 만화방이 생겼는데, 읽고 싶은 만화들이 많았다. 그리고 엄만 정액제를 끊어주셨다. 만화책도 책이라고. 시간이 흘러 다시 물어보니 만화책이던 동화책이던, 읽는 습관이 중요하기에 책의 기준을 따로 두지 않으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끝날 무렵까지 나는 독서는 꾸준하게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 책과 거리가 멀어졌고, 세네갈에 가서야 다시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 삶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책을 읽을만한 공간도 없고 심적 여유도 없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나는 토론하고 책을 좋아했다. 그때 나의 중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대구광역시 시립중앙도서관에서 하는 독서토론회를 소개해 줬다. 엄마랑만 하던 토론을 정말 신나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타인들의 의견을 마음껏 듣는, 정말 자유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또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른 토론회도 방문하고 그런 사교모임이 꽤 재미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진학해서 학교 내에서는 토론의 기회가 별로 없었다.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나쁜 성적이 아니었던 내가 실업계 고교로 진학해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에 따라 언변도 조심해야 했다. 나의 별 의미 없는 말들이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나를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양분들이라 생각이 든다. 때때로 학생들이나 20대 대상으로 강의를 나가거나 대화를 할 일이 있다. 그때 종종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는 나의 목소리를 색을 입히는 것보다, 흰 도화지에 찍어낸 것처럼 제공된 교육을 복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석사 1학기때 쓴 논문이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관련한 것이었다. 한국의 교육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 주입식 교육의 대표적이며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보다 받아쓰는 교육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러한 교육 방식을 은행예금식 교육이라 했다. 기존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예금하듯 주입하는 교육 방법인 것이다. 특히 이러한 교육 방식은 교사-학생 간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되는데, 교사는 '교사'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울 수도 있고 함께 공동연구를 할 수 있지만 은행예금식 사고는 이미 '지식(돈)'이 만들어져 있고 그것이 변형되지 않고 예금만 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위험한 것은 편향된 사상의 주입과 같이 그 '지식'의 타당성, 정당성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교육의 방식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제공되어야 하는 것인지 교육자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혹은 학부모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 본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수업시간 내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을 할 기회가 없었다.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 '혼자 철학한다', '꿈 많은 몽상가' 등으로 치부받기 쉬웠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교육단계에서 삶을 꿈꾸기 위해서는 한계를 두지 않고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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