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뚜밥이야기
나는 참 감정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또 때로는 지나치게도 이성적여져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도 만든다.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면서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어느 쪽도 명확하게 '이렇다'할만한- 확실하게도 단정 지을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닐 테다. 생각보다 많은것들이 '이렇다'할만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지난 한 달간 많이도 아프고 힘들었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하면서 다 괜찮아졌다-라고 하면서 괜찮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눈을 가리기 위해 바쁨으로 승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다보면 다시 생각의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고 조금 뒤로 미뤄버렸다. 쓰다 만 글을 올릴까-라고도 생각했지만, 내 감정은 전혀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세네갈래가 미워졌었다. 아니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어졌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세네갈에 대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 땅을 밟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혹여나 내 글로 선입견이 생기지는 않을까, 좋은 글만을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격대로 직구를 날려 내려 깔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일단 중단했다. 내 감정이나 성격처럼 이렇다-할만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고 수많은 종족들이 오가는 곳이다. 내 글로 내가 만난 사람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기를 바랄 뿐 그 어떤 비약도 선입견도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국인을 이렇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듯이.
예전에 학교에서 잠깐 만난 세네갈래와 나눈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었다. 한국에는 절이 몇 개나 되냐, 한국에 가고 싶다,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 등등. 그 친구는 학교 옆에서 살고 있고 그 친구와 몇 번 마주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번호교환을 요청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그에게 번호를 건네주었다. 그것이 시작의 발단이 되었다. 하루 웬 종일 그 아이는 전화를 해댓고 심지어 집 근처로 찾아오겠다고 난리 아닌 난리를 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새벽이고 24시간 줄줄이 전화를 해대는 탓에 노이로제에 걸릴 듯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소름 돋아했고 그 아이를 피해 학교 뒤로 돌아 집에 가곤 했다. 처음에는 계속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때 전화를 해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가 오기에 전화를 받아 지금 바쁘니 다음에 내가 전화하겠다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약 세시 간뒤면 그 아이에게서 전화는 다시 왔다. 그렇게 받지 않자 새벽 1시, 2시에도 벨소리는 울렸고 나는 그 아이의 번호를 차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나와 연애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리 내가 결혼했다는 말을 해도 그는 믿지 않았던 것일까? 혹은 외국인에 대해 정말 호기 진마음에 전화를 무턱대고 그리도 해댄 것이었을까? 그의 번호를 차단한 이후로 내 핸드폰의 배터리는 좀 더 오랜 시간을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 현장 사업을 진행하느라 부기관장인 무슈 은자이와 계속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현장 사업은 코이카에서 지원해주는 것으로 단원이 직접 프로젝트를 기관과 논의해 기획을 하고 결산까지 맺는 사업이다. 물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심의회를 통해 통과를 하고 본부 승인이 나야 지원금이 나온다. 이번 달까지 기획서와 발표 준비를 마쳐야 해서 계속 무슈은자이와 회의를 진행하는데 이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업을 진행하거나 평소에 대화하는 것은 손으로 발로 어떻게든 설명하면 되는데 사업을 진행하려니 모르는 단어도 많을뿐더러 의사소통이 이렇게도 어려울 수가 없다. 한국어로 해도 협상이 어려운 일들을 잘 알지도 못하는 불어로 이야기하자니 속이 터지고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혹시라도 이 지원금을 기관에서 빼돌리지는 않을까, 부실공사를 하지는 않을까, 무의미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신경을 곧추세워 나는 '극도로 예민하며 뿌리 끝까지 의심하는 한국인'이 되어버렸다. 6월 초에 부탁했던 견적서는 22일 오늘에야 메일로 발송이 되었고 나는 왜 이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며 학교는 이 사업을 정말로 필요해서 진행하는 것인지, 혹은 돈 많은 호구정 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좌절과 의심과 스스로를 자학하고 괴롭혔다.
"무슈은자이, 아직도 견적서가 안 왔어.. 언제 보낼 거야?"
"빈따, 네가 견적서를 3개나 요청했잖아.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야.."
"무슈은자이, 내가 9일까지 달라고 했고 가능하다고 했잖아. "
"빈따, 이게 바로 세네갈이야. 보편적인 일이야. "
"무슈은자이! 너는 세네갈래인데 이렇게 일 안 하잖아! 너는 이런 사람 아니잖아!"
"응 나는 이렇게 일하는 거 싫어하긴 해."
"오늘까지 부탁해. "
이 말을 한 2주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주 수도에서 견적서와 업체를 찾아다니며 이곳저곳 엄청난 스케줄을 해냈고 내 체력이 바닥이 나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눈치를 챘다. 며칠을 밤잠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온 수확물에 아직 보내오지 않은 그의 견적서를 확인하곤 화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9일까지 기한이었던 견적서는 20일 월요일에 학교에 갔을 때에도 결국 견적서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스트레스라도 풀듯 멜로 드라마 한편에 엉엉 눈물을 쏟곤 잠이 들었다. 그렇게 기절해서 잠이 들었고 화요일에 아이들 기말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내 수업은 8시 시작. 전날 잠들어 새벽부터 일어나 시험 준비물들을 챙겨서 학교로 갔다. 이상하게도 방학이 다가오니 아이들이 조금씩 늦게 오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시험을 보겠다고 선포한 날 두 녀석이 강의실 앞에 앉아있다.
"왜 너네들 뿐이야?"
"모르겠어요"
그리고 8시 20분. 한 녀석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지금 몇 시야?"
"지금? 몰라"
"당장 내 강의실에서 나가"
"크크크크 왜 그래~마담~ "
"나가"
말없이 밖에 나가 앉는다. 그리고 제시간에 왔던 은다이가 그 아이의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마담.. 마들렌이 수업에 참여하게 해주면 안 될까요?"
"안돼 "
"마담.. 마들렌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다녀왔대요."
"왜 네가 변명하니? 너는 너 할 일 해."
이제야 아이들의 웃음이 뚝 끊긴다.
그리고 마들렌이 안절부절못하자 은다이는 계속 내게 마들렌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은다이, 너는 오늘 시험 볼 준비해. 네가 왜 마들렌 변명을 하니? 직접 와서 사과하고 변명하라 해."
그리고 마들렌은 슬금슬금 기어 오더니 잘못했다는 말은커녕, 교재도 들고 오지 않았단다.
한숨에 한숨이다. 늦었으면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이고 이유가 있으면 사과를 하고 왜 늦었는지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나의 말에 처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무서워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장 교재를 가져오란 말에 후다닥 뛰어나간다.
그리고 8시 40분경, 두 녀석이 또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지금 몇 시야?"
"8시 40분이요."
"왜 늦었니?"
"아파서요."
"내 강의실에서 나가. "
아프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느껴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양치기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생각했다. 그랬더니 의자를 끌어오더니 실습실 앞 칠판 쪽에 수업 참관이라도 하는 듯 자리 잡으려 한다.
"우습니? 내 강의실에서 나가. "
또 아이들이 낄낄대며 강의실 밖을 나간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후 시험을 진행하기로 한다. 얄밉게도 오늘따라 은다이가 참 잘한다.
"마담, 시험 교재보고 진행하나요?"
"안 보고 할 수 있어?"
"네"
"그래, 그럼 너는 안 보고 진행해"
그리고 은다이는 순식간에 손반죽을 해 뚝딱하고 쿠키를 만들어냈다.
뒤늦게 쫓겨난 아이들을 확인하러 나갔더니 머리메무세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다.
"너네 왜 집에 안 가고 여기 앉아있니?"
"다음 수업 기다려요."
"응, 그래 열심히 기다리렴. "
하고 들어와버렸다.
9시가 넘은 시각. 화를 꾹꾹 눌러 아이들에게 다시 나갔다. 게 중 한 녀석은 지난 수업에도 결석을 했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꺼이꺼이 흘리고 있다.
"보통 학생들이 늦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설명을 하는 게 정상 아니니?"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내수업에 늦는 일 없도록해. 알겠니?"
"네 죄송합니다. "
그렇게 아이들과 기싸움으로 시작한 한 학기의 수업은 기싸움으로 끝났다.
내가 준 사랑만큼 돌려받고 싶었던 억지스러운 감정이 있었던 걸까, 밀려온 감정들을 정리하지 않은 채 묵묵히 쌓아두기만 해서였을까. 시험이 끝나고 돌아와 그대로 누워 잠만 자기 시작했다. 당장 다음 주까지 보내야 하는 현장 사업 계획서는 모두 내려놓았고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있다는 "또 오해영"드라마를 정주행을 했고 컴퓨터는 켜지도 않았다. 침대에 꼭 붙어 드라마만 붙잡고 있었다. 칼국수를 끓여먹었고 비삽 주스를 만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침대에 누워 창문을 열어놓으니 선선한 바람이 커튼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우리는 참 힘을 주고 살아간다는 게 문득 느껴졌다. 내 욕심으로 이 사업을 어떻게든 진행하겠다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 나 자신만 괴롭혀 댓다. 서류가 오면 그때 시작하면 되는 것을 오지 않을 견적서만 끙끙 거리며 애가 닳도록 아파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이렇게 일했다간 추방당할지도 모른다. 당장 보내라는 메일은 당장 보내야 하고 기한을 주면 그때까지 꼭 끝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한국처럼 끙끙거리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학교를 찾아가 서류를 달라고 해도 기다리라는 답변만 하는이들에게 "한국처럼 일해!!"라고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며 마음을 많이 내려놓는 연습을 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스트레스였던 이유는 내려놓지 못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해서였다. 그것이 한국 사회적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마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을 둘러볼 수 있었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이들보다 선진국이라하여 결코 이들에게 한국처럼 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람을 돌아보며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줄 알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안되면 서류들을 모아 하반기에 신청해도 될걸 기여코 억지를 부리며 주먹 꽉- 쥐곤 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며칠 딱 쉬고 나니 컨디션도 돌아오고 기분도 한결 좋다. 또 마침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무슈 은자이에게서 전화가 왔고 견적서도 도착했다. 나는 무엇에 그렇게도 조급해하고 조여 매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한 박자- 한 박자 천천히 가다 보면 숨도 차지 않고 길게 갈 텐데 자꾸만 빨리 먼저 뛰어가 먼저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었을까. 빨리 먼저 뛰어가 봐야 끝은 요단강일 텐데. 이렇게 쥐어짜고 있던 마음을 풀어주고 나니 더 이상 이들이 밉지 않았다. 조금 모자라면 어때- 조금 못나면 어때- 조금 아쉬우면 어때-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 된 것이다.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