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콩 Jul 29. 2016

성인식, 혼자가 되다.

세네갈레인 줄 착각하고 있는 하얀 뚜밥의 이야기


 

지난 여정의 마지막 날-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피스테라



 지난 여행에서 나는 그 여행을 한 삶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약 800Km, 그리고 그 뒤로 묵시아- 피네스테라까지 약 900km 정도를 걸은 것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기 시작해 점점 성장해 나중엔 하루에 40Km 이상을 걸으며 30Km 이상 걷는 것이 쉬운 날도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2병도 사하군쯤에서 겪으며 이 길을 벗어나겠다며 온갖 힘을 써 보았지만 나는 그 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이 된 건지 혹은 말로만, 눈물로만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 나는 그길에 오로지 갇혀버렸었다. 그리고 끝내 다 걸었고 마지막 피네스테라에서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바다 아래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나의 여러 삶들 중 한 삶이 아름답게도 바다 위로 떨어지는 태양과 함께 마감했던 것이었다. 이곳에 와 나의 멘토이자 스승님께 메일을 보냈었다. 오늘 보낸 메일함을 찾아보니 이곳에 온 지 스무날쯤 되던 날 "아직은 아장아장 걸음마하는 수준으로 한마디 한마디 뱉어내고 있어요!"라고 보냈었다. 그리고 한 달 전쯤 보낸 메일에 " 늠름하게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 중학생 정도는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라고 보냈었다. 나는 이 작은 하나하나의 여정들을 하나의 삶들로 표현해 내가 어디쯤 서있고 언제쯤 이 삶을 마감할지 내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의 내 삶의 몇%를 걸었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처음에 내가 사는 께베메르에 이사와 모든 창문도 꽁꽁 끌어 잠그고 나를 가둬두었다. 세상 밖은 위험한 곳이며 온갖 오염된 것들과 모래, 먼지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바닥을 쓸고 닦았다. 최근까지는 열심히 매일 쓸고 닦았지만 귀찮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이제는 창문도 활짝 열고 심지어 창문을 열어놓고 잠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변화인 것 같다. 어쨌든 초반에 집주인이자 친구인 마담 실라에게 큰 도움을 받았었다. 전기가 나가면 전화를 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실라에게 전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유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세탁기'를 설치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모든 현지인은 나의 세탁기에 두 눈이 휘둥그레 지기 때문이다. 조명을 달아주고 전기공사를 해준 아저씨가 세탁기까지 설치해주고 가셨다. 전기를 꼽자마자 세탁기가 시범가동인지 자동으로 돌아가버렸다. 밤 8시. 탈수가 시작되고 앞집 아저씨는 나를 찾아와 엄청 혼내곤 가셨다. 내가 아는 이곳 세네갈 래들은 밤 9시, 10시가 되어야 저녁을 먹고 12시쯤 잠자리에 들던데 아저씨는 밤 10시가 되면 모든 불이 꺼진다. 가끔 9시에 꺼지는 날도 있다. 여하튼, 아저씨는 저녁에는 쉬고 싶으니 이 시끄러운 소리를 좀 꺼달라고 호통 치고 가셨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나는 세탁기를 강제 종료시켜버렸었다. 이사 오고 앞집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첫인상부터 시끄럽고 무례한 아이로 찍혀버렸다. 며칠 뒤 미안한 마음에 머핀을 굽기로 했다. 하지만 저울도 없었고 혼자 감으로 끄적끄적 머핀을 만들어 앞집 아줌마를 찾아갔다. 그리곤 머핀을 건네며 지난날 밤에 미안했다며 사과를 했다. 그렇게 나의 보호자(?) 두 분이 탄생했다. 아저씨는 여전히도 무서운 마음에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웠고 무슨 일만 있으면 아줌마를 찾았다. 그럼 아줌마가 알아서 아저씨를 이렇게 저렇게 조종(?)하셨다. 

 지난 에피소드에서도 말했지만 40도가 넘는 온도에서 온종일 정전이 있었고 아줌마를 찾아갔다. 아랫집 두 집은 모두 전기가 들어왔고 우리 두 집만 전기가 나가버렸던 것이었다. 아랫집은 이사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사 나가며 모두 정산하고 나갔지만 우리 두 집은 고지서가 오지 않아 페이를 하지 못해 끊겼던 것이다. 징징거리며 아줌마를 찾아갔더니 아저씨 전화 몇 통에 전기공사에선 달려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페이를 하고 나니 전기는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아저씨는 gendarmerie라는 현병대 교육관에서 근무하신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꽤 높은 직급에서 일하시는 것 같다. 


gendarmerie <출처 : 네이버>
1. [옛] 기병대, 왕실 근위(기병)대 gendarmerie de la maréchaussée 기마 헌병대

2.(국경 수비·치안 유지까지 담당하는) 헌병, 헌병대 gendarmerie nationale[départementale] 국가[지방] 헌병대 

3. 헌병대 막사[본부]

지난번 아저씨 차를 타고 수도에 간 적이 있었다. 요즘 테러 문제인지 길에서 헌병대들이 차 안을 검사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저씨 차는 잡히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심히 보니 아저씨 차가 지나가면 헌병들이 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찬 타가 이렇게 높은 차였다니! 다시 한 번 놀라웠다. 차에 내려서 보니 이렇게 잔달머리들의 차에는 표식이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차의 번호판에 표시된 세네갈 국기와 잔달머리 표식 

 이후로 종종 물이 끊기면 우리 집만의 문제인지 앞집 아줌마에게 달려가 확인을 하기도 하고 물이 모자라면 물 동냥을 하기도 하며 왕래가 잦아졌다. 초반에 단수로 몇 달을 고생했었다. 두 달이 넘도록 물이나 오지 않아 새벽에 물을 받아 낮동안 사용했었다. 세탁기도 물을 받아 부어줘야 했다. 그때 아줌마도 나도 엄청 힘들어했던 것 같다. 내가 자꾸 힘들어하는 날이면 아줌마는 선물을 줬다. 바로 츄칼리 라는것인데 여자들이 집에서 좋은 향을 내기 위해 피우는 향 같은 것이다. 향료 같은 것을 숯에다 올려두면 것이 타면서 향을 낸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독하다며 싫어하기도 츄칼리는 향을 혼합해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츄칼리는 향이 너무 좋다.  

아줌마가 피워준 츄칼리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농담으로 민지에게 그런 말을 했다.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이시는데 혹시 또 두 번째 부인, 세 번째부인 이런 건 아니겠지?" 

.. 그 말을 하고 난 후 아저씨 차를 타고 수도를 가는데 띠에스에 들려 아저씨 딸을 만났다. 나는 당연히 두 분의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줌마가 말했다. "그와 나는 아이가 없어" 이렇게 또 오지랖이 발동해 궁금한 게 넘쳐났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다정함은 수도로 가는 길 내내 자식들의 집을 들려 인사를 하곤 수도로 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줌마 집 앞에 내려 아저씨는 다른 자식의 집으로 가셨고 아줌마 홀로 남으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아줌마와 통화에 함께 지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상상이고 추측이지만 아저씨의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셨거나 이혼하신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아닐 수도 있고.. 내 기억 속 두 분의 사랑스러운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렇게 언제나 나의 든든했던 부모님 같았던, 보호자 같았던 두 분이 지난 화요일 26일에 께베메르를 떠나버리셨다. 아저씨의 2년간 께베메르에서의 미션이 끝난것이다. 자주 집을 비우신 편이었지만 막상 정말 떠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날 아저씨네에서 밥을 먹으며 아줌마와 아저씨와 계속 수다를 떨었다. 아줌마는 중국인과 일본인, 한국인의 차이가 뭐냐는둥 한국에서는 어떻게 밥을 먹냐는 둥 궁금한 게 많으셨다. 그날의 우리의 이별 시간은 20살을 맞이해 오로지 나 홀로 독립을 하는 기분이었다. 꽉-찬 7개월 동안 그들의 보호 아래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홀로 자라야 한다며 나를 독립시켜주는 기분이었다. 아줌마는 마지막까지 "이제 빈따 혼자네..", "이제 너 혼자야"라고 쉼 없이 되새겨 주셨다. 마음 한편 울컥했지만 내게 줄려고 했던 선물을 다카르에 두고 왔다며 9월에 있을 명절에 집에 와서 보내라며 초대를 해주며 마지막이 아님을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아줌마가 똑같은 목걸이가 두 개가 있다며 너 하나 나하나 가지자며 목걸이도 하나 주셨다. 나는 두 분께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라며 내가 만든 드림케쳐와 한국에서 가져온 복주머니를 드렸다. 좋은 꿈 꾸시고 좋은 것만 들어올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렇게 두 분으로부터 독립하며 나는 이 삶 속에서 성인식을 맞이했다고 정의했다. 앞으로의 1년 하고 두세 달쯤 되는 시간 동안 또 성인으로써의 삶을 살아갈 테고 좌 절도하고 절망도 하고 행복하며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 하겠지. 

 아직 이별이 너무나 서툴고 두려운 나는 띠에스에서는 가족들과 헤어지며 엉엉 울었다. 관리요원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두 또 금방 볼 수 있다며 당황했지만 마음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큰 의미들이어서 헤어짐이 쉽지가 않았다. 언젠가 오래전, 그 헤어짐이 두려워 마음조차 주지 않았던 나의 모습보다 적어도 너무 슬프고 아픈 이별이지만 이렇게 열심히 마음을 준다는 것이 좋다. 마음을 주는 것은 이리도 쉬운데 이별을 하는 것은 겪어도 겪어도 쉽지가 않다.  이 작은 이별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내년에 한국 돌아갈 때 얼마나 아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운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