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레인줄 착각하고 있는 하얀 뚜밥의 이야기
이곳에 오면 선배 단원들, 한인분들 등등 여럿 사람에게 세네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때는 나의 세네갈 자아가 형성이 되고 선입견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의 사고의 자유를 뺏겨버리는 셈이다.
내가 가진 세네갈의 선입견이면서 또 현실인 것들 중,
첫 번째, 인샬라. 모든 것이 인샬라로 통하면서 나타나지 않는다. 인샬라는 미래는 신만이 안다는 뜻이다. 특히 인터넷 설치하던 날 오래 걸릴 것을 각오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날 기사가 찾아오더니 인터넷 설치할 위치를 보고 가더니 내일 11시에 다시 방문해서 설치해주겠다며 사라졌다. 다음날 수업도 잡지 않고 집에서 전전긍긍 기다리기 시작했다. 11시 30분. 결국 전화를 했다.
"왜 안와??"
"30분 뒤에 갈게. 인샬라"
그리고 12시 30분.. 다시 전화를 했다.
"왜 안와???"
"1시에 갈게. 인샬라"
그리고 그날 오후 그는 기도를 해야 했고 점심을 먹어야 했고 퇴근을 해야 했다.
다음날은 금요일이었고 오전 근무만 하기 때문에 설치할 수가 없었고
결국 인터넷은 2주 뒤에 설치가 완료될 수 있었다.
두 번째, "Donnez moi d'argent (나 돈 좀 줘)" 길을 가다 보면 딸리베라고 하는 어린아이들이 구걸을 참 많이 한다. 딸리베는 그냥 와서 계속 돈 달라는 말만 한다. 딸리베는 코란 학교에서 아침 일찍 코란을 공부하고 그 뒤로는 길에서 구걸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 구걸을 한 돈은 다시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마라부에게 전달이 되고 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면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고 한다. 작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빼곡하게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고 이들은 언젠가 본인도 마라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월로프어로 딸리비 라는 말이 있다. '도로, 길'라는 뜻이다. 그 딸리베가 딸리비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열댓 명의 아이들이 몰려와 돈 달라는 말만 하고 어떤 아이 들은 코란을 외우며 돈 달라고 하기도 한다. 딸리베 뿐만 아니다. 길에는 아이를 엎고 나와 돈 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고 눈먼 장님, 알비노, 눈먼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꼬마 아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길에 나와 구걸을 한다. 심지어는 아직 내 주변에는 없었지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꽤 돈을 버는 현지인도 시계나 가지고 있는 물건보고 '이거 나 줘!'라며 진담반 장난반 달라고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삶 속에 진담인 듯 농담인 듯 뿌리 박힌 돈 달라는 말이 괜스레 씁쓸하고 슬프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원조는 아프리카를 망하게 한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받음으로 발전이 아니라 나태해져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려는 모습들을 보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이카에서 기관에 단원을 파견하는 것이 기관을 위함이 아니라 당연히 파견되어야 마땅한 분위기로 느껴졌고, 세네갈에 각 나라별 봉사자들이 와있는 것은 봉사자가 아니라 한 직업군으로써 돈 많이 버는 외국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인식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지인에 비해서 봉사자가 받고 있는 생활비는 적지는 않다. 생활하는데 한국만큼은 아니래도 풍족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대부분 본국에서 벌던 돈의 반도안되는 돈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는데 현지인들의 "부자 호구"취급은 조금은 속상하다. 봉사자는 부자다, 아니다의 딜레마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옆집사는 한 사람으로써가 아닌 호구로써 살아가는 건 참 속상하고 싫다!
최근 며칠 사이 이 모든 선입견이 깨지는 사건들이 몇몇 있었다. 며칠 전 8시 수업이라 새벽에 일찍 학교를 갔다 오니 전기가 끊겨있었다. 우리 집은 정전은 잦지만 길지가 않아 그간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약 20분 정도면 전기가 돌아왔고 가장 길었던 정전이 고작 2시간 정도였다. 근데 그날은 앞집 아줌마 말에 의하면 9시부터 정전이 시작되었고 내가 집에 돌아온 1시에도 여전히 정전이었다. 여행을 다녀오셔서 15일 만에 만난 앞집 아줌마와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43도, 44도에 육박하는 더위를 이기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잤다.
3시. 여전히 정전이다. 집 앞 부띠끄(작은 슈퍼)에가 핸드폰 충전을 할 크레딧 카드를 사며 부띠끄도 정전이냐고 물었다. 오늘 정전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리고 마침 아랫집 아줌마가 부띠끄 앞에 앉아 아기와 놀고 있기에 부띠끄 아저씨가 물어본다.
"너희 집 아침부터 정전이라며?"
그리고 아줌마가 대답한다.
"아니? 오늘 정전이었던 적 없는데?" 라며 되묻는다.
그 순간 벙찌기 시작했다. 정말 아랫집은 전기가 들어왔다. 다시 앞집 아줌마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앞집 아저씨가 확인해보니 돈을 내지 않아 전기를 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지서는 집으로 날아오지 않았고 아래층은 지난달 두 집 다 이사를 나갔고 새로운 가족들이 이사를 와서 정산이 되었던 것이다. 오후 4시. 이쯤 되면 셀넬렉(전력공사)도 퇴근할 시간이다. 망했다. 냉장고는 7시간째 멈춰져 있고 나는 내일 수도로 가야만 하는데 해결방법을 못 찾아 난감해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계속 어디엔가 통화를 하시고 나는 아줌마와 징징대며 전전긍긍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10분쯤 지났을까 앞집 아저씨가 문을 쿵쿵 두드리더니 15000 세파를 들고 나오라 한다. 무슨 일이냐 했더니 셀넬렉에서 사람이 온 것이다.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세네갈에서는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 필요한 인성은 '인내'였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제시간에 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하루를 날려먹어야 하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십여 분 만에 퇴근시간이 다되어서 셀넬렉에서 돈을 받고 전기를 연결해주러 왔다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6개월 살았던 나도, 1년을 살았던 다른 단원들도 이 생소한 소식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앞집 아저씨의 파워가 위력 한 것일 까? 외국인에게만 인내의 고통을 줬던 것일까? 나의 선입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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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께베메르는 아주 작고 귀여운 마을이다. 지금 파견된 단원들은 모두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지만 나는 중소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큰 문제점은 '교통'이다. 사람이 많지 않고 외지로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많지 않은 탓에 수도로 가는 차가 없다. 또 수도에서 께베메르로 올 때면 께베메르 윗 도시인 루가행 차를 타고 루가의 차비를 내고 께베메르를 지나갈 때 여기서 세워주세요 라고 말해야 한다.
세네갈에는 몇 종류의 교통수단이 있는데
1. 시외 버스, 미니버스 ; 한 마을에서 한번 정도 세움.(20-30명 정도 차면 출발한다.)
2. 자간자이 ; 손만 뻗으면 어디서든 내려줌
3. 셋플라스 ; 7자리라는 뜻의 셋플라스는 7명의 같은 목적지인 사람들이 모이면 출발한다.
4. 자카르타 ; 오토바이 택시
그 외에도 많은 교통수단이 있지만 교통수단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수도인 다카르로 가기 위해 나는 보통 중간에 서지 않고 다이렉트로 가는 셋플라스를 이용하는 편인데 하필이면 우리 동네에는 출발하는 셋플라스가 없다. 미니버스를 타고 2시간, 2시간 반 정도를 달려 수도 가기 전 큰 도시인 띠에스에 내린다. 띠에스에서 셋플라스를 타고 다시 수도로 향하는 편이다. 이것도 번거로운 것이 앞서 말했듯 사람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게 하루가 걸릴지라도. 하지만 이날은 띠에스로 향하는 셋플라스도, 미니버스도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같이 거리로 나왔지만 유독 차가 없었고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세 시간쯤 기다렸을까. 정류장에서 누군가 다카르로 향하는 미니버스가 많이 찼다며 알려준다. 다이렉트로 가는 셋플라스의 경우 약 3-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마을마다 서는 미니버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짧아야 6시간은 걸릴 것 같다. 두려움에 미니버스에 올랐다 내렸다는 네 번을 반복했다. 어떤 오토바이 택시인 자카르타 기사가 네 마을 앞으로 가면 히치하이킹이 더 쉽다며 귀띔을 해준다. 그래! 그럼 그 마을로 가자! 하고 오토바이에 오른다. 200미터쯤 갔을까, 경찰에 붙잡혀 우리는 다시 께베메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자카르타는 다른 동네로 이동은 안되나 보다. 지친 마음에 딱 한 번만 더 히치하이킹을 도전하자 하곤 정류장에서 다카르 방향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으며 히치하이킹을 도전했고 마침 한 차가 섰다. 이곳 세네갈은 히치하이킹이 유럽권쪽처럼 무료가 아니라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차를 잡아도 타기 전 얼마 내야 해? 하고 물어야 한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기사가 "그냥 타"라고 한다. 순간 '타도되는 걸까?'하는 의심은 들었지만 오전 내내 지친 마음이 커서일까, 그 아저씨의 인상이 좋아서일까, 그렇게 믿고싶었던걸까 그냥 차에 탑승해버렸다. 그리곤 탑승하자말자 아저씨의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어디사는지, 어떤직업을가지고있는지, 가족은 어디에있는지. 그리고 가다가 어떤 아줌마가 한분 더 탔고 알고 보니 짐이 있고 많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은 차를 태워주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수도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차를 세운다. 그리고 아줌마가 트렁크에 가더니 아까 실었던 물건이 쏟겼다고 한다. 수도에 팔러 간단다. 뭐냐고 물었더니 우유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액체였다. 나는 휴지를 드렸고 괜히 내가 눈치 보였다. 아저씨 차에 흘린 그 의문의 액체 때문에. 한참 뒤 톨게이트에서 아저씨는 톨게이트비를 지불하고 아줌마에게 돌아갈 때 차비를 하라며 잔돈을 준다.
-!
맙소사. 너무 깜짝 놀라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보통 사람이면 트렁크에 흘린 액체로 짜증 나하고 기분 나빠할 텐데 그는 그녀가 팔아야 할 액체를 쏟아 그게 계속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무사히 다카르 옆 끄르마사에서 내려주셨고 본인 집을 지나쳐 내가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그와 그녀와 인사를 마치고 나는 무사히 수도로 들어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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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카에서는 1년에 1250불의 지원금이 나온다. 나는 그 돈으로 학교에 필요한 물건들을 살 수 있는데 1250불에서 교통비는 제외가 된다. 수업을 진행하며 한 개의 가스오븐으로 5명의 빵을 구우려니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고 만든 빵을 오전 중 판매를 해 수익을 낼려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돈으로 가스오븐을 추가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도에서 오븐은 구매가 가능하고 이 시골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셋플라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셋플라스를 탈려니 커다란 오븐 외에도 각종 식기구들로 짐이 너무 많아 무리였다. 그래서 한화로 6만원이라는 자비를 들여 택시를 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느 날 기관장과 대화하다가 월요일 새벽에 출발해서 온다고 했더니 어떻게 오냐고 물어본다. 택시를 타려고 한다고 했더니 기관이 돈이 없으니 셋플라스를 타라고 한다. 애초에 차비를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단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럼 셋플라스비를 내게 주면 남은 돈을 보태어 택시를 타겠다고 했다. 숙소에서 피킨 정류장까지 오븐과 식기구들을 실어서 택시를 타고 가서 다시 셋플라스를 타고 께베메르에 도착해 다시 마차를 불러 짐을 옮길 생각하니 막막했던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며 이야기했더니 갑자기 학교에서 택시비를 내주겠다고 한다. 아니라며 셋플라스비만 받겠다고 기여코 거절해도 택시비를 주겠단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택시비를 내겠다며 한참을 싸웠다. 나에게도 비싼 6만원이라는 돈은 기관에서도 물론 비싸다. 하지만 너무 이쁘게도 말해주는 우리 기관사람들,
"빈따, 네가 오븐도사고 학교에 훨씬 많은 돈을 들여서 식기구들을 사주잖아. 30000세파는 내줄 수 있어. 걱정마"
내 선입견이었다. 한국에서도 쉽게 '나 돈 좀 줘', '5000만 땡겨줘' 이런 장난들을 많이 하는데 원조국가에 왔기 때문에 그 장난들이 더 크게 부각되어 선입견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조를 받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꾸만 돈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고 물품 지원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을 했던 것이었다. 물론 대도시에 있는 다른 단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에서 너무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코 그들이 세네갈의 전부가 아님에도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마저도 내가 선입견으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원조국가이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로 내가 만든 선입견들로 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나의 상상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쓴이. 김은빈
직업. 영감님처럼 동네 시찰 나가기
부업. 세네갈의 작은 마을 께베메르에서 아이들 요리교육을 하며 지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