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탔는데 이런저런 안부인사를 하다가 기사가 문득 내게 묻는다.
"한국도 이렇게 더워?"
나는 흠칫 놀라 어떻게 한국인지 알았느냐 물었더니 얼굴보고 알았단다. 내가 지난2년을 보내며 처음겪는 일이었다. 가뭄에 콩나듯 너는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라고 묻는 경우는 있어도 스스로 확신하고 내가 한국인이라고 단정짓고 질문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실 한국인들도 세네갈이 어디에 붙어있는 국가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아프리카를 한 대륙이 아닌 한 나라쯤으로 생각하고 치부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듯 이곳 사람들도 지구 저 반대편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한국을 한 나라쯤으로 생각하고 같은언어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인종차별이 아닌 무지에서 오는 것인데 그걸 잘 몰랐던 나는 얼마나 화를 냈었는지 모른다. 몰라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우리는 언어도 역사도 다르다는 말과 함께 한국인들도 사실 이티오피아랑 세네갈이랑 같은 언어쓰고 같은 역사를 가진 같은 나라인줄 알아.라고 심플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소리에 다들 헉! 하고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라고 반응들을 보이면 우리가 저랬었구나, 하고 넘어가게 된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 전혀 다른 습성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적응을 하는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막상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몇몇 칼럼이나 기사들을 보면, 빈곤 포르노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 미디어를 통해 가난하고 다 죽어가는, 심각한 상황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이것이 아프리카입니다. 라며 도와줘야한다는둥 동정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마음으로 이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과 생활반경 습관 습성등을 파악하지 않은 채 한국의 기준으로 사업을 하거나 적용되지 않을 것들로 꾸려놓고는 '해줘도 못써먹는다', '해줘봐야 다 망가진다'라는 등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실망하고 상처받고 돌아가는 경우를 쉽세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런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의 선입견을 깨기까지가 너무 힘들었고 선입견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는 갖은 쪽팔림과 말로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예전에 동네 한 가정에서 우기철 피해로인해 현대가옥이 아닌 나무짚따위와 같은걸로 만든 까즈라고 불리는 현지전통 가옥이 무너진 사례가 있었다. 당시 기관 외 내가 할수있는 일을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그 가옥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방법을 모색하다가 이곳에 친구중에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 친구가 있어서 엽서사이즈의 그 그림을 한국에 클라우드펀딩을 통해 판매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새웠다. 아는 지인중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그림들은 전시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있어서 승산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가옥을 지어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스토리가 빠진전시는 쉽지않을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후에도 몇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으나 지역 도서관 도서구매나 아동지역개발센터 환경개선 등의 이유로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져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것이 빈곤포르노가 야기하는 문제점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꾸만 자극적인것을 이야기하게되고 아프리카 인들에대해 선입견은 나날이 높아지고 그들을 한 인격체로써 와닿아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라고 하면 모두 천쪼가리 뒤집어쓰고 초원을 달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방문하고 나선 '에이, 사람 사는곳이네' 혹은 '최빈국 맞아? 왜이렇게 잘살아!' 등의 반응을 볼 수있다. 아니, 당연한 선입견이다. 삐까번쩍한 도로들과 유럽식 마트들이 깔려있고 수도만해도 넘쳐나는 외국인들로 그들의 입맛에맞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면서도 의외의 곳에서 나는 내가 최빈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의료와 교육이다. 내가 살았던 소도시에서는 병원이없다. 작은 보건소 하나만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약처방이상으로는 어떤 진료도 받아본적이 없었다. 처음에 왔던 나였더라면 왜 그누구도 이곳에 그럴싸한 병원을 지어주지 않느냐 화를 냈을 것이다. 임기가 끝나는 이 시점에 그럴싸한 병원을 지어주게된다면 병원비가 비싸질 것이고 그나마도 병원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역 경제가 살아야 하는데 장사치나, 목공소, 철물점정도야 장사가 잘되지만 그것마저도 기술직이고 또 이곳은 와이프를 4명까지 둘수있기도 하겠거니와 아이를 여럿낳는 것을 선호하는 대가족이기 때문에 가족끼리 장사를 하기때문에 취직이 쉽지가 않다. 여성인구비율이 월등히 높은 탓에 여자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도 수도가 아니면 미용실이나 식당에 취직이 그나마 잘 되는 이유로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우곤 한다. 차라리 이 경우라면 그나마 나은 경우다. 지방의 경우 아이들이 받는 월급은 적게는 한화 6만원부터 많게는 12만원정도이다. 12만원의 월급은 사실 꿈에직업에 가까운 급여이다. 높은 물가로 텍도없는 월급을 받게되니 여자아이들의 탈출구는 결국 돈 잘 버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다. 지방의 경우 10대와 40대가 결혼하는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도하고 남성이 와이프를 넷까지 두는 것에 대해 종교를 떠나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삐까뻔쩍한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지만 본질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빈곤포르노로 만들어진 선입견을 깨야만 한다. 교육이 더 강화가 되어야하고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지역개발 및 일자리 창출이되어야 하는데 외국인기업들은 외국인끼리 하려하고 빈익빈 부익부가 골로 깊어져만 가는 꼴이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만 보이는, 아무래도 ODA에서 자꾸만 성과만 재촉하다보니 그런게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스스로 일어나되 옆에서 서포트를 해야하는데 모두들 본국에서 일하듯 현지인들이 서포트를 하고 이해를 다 하기도전에 숨가쁘게 넘어가버린 탓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발전속도를 늦춰야만 한다. 그저 선진국들처럼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바뀌고 나면 훗날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을 함께해야만 한다. 학교만 지어줄것이 아니라 학교에 학생들이 갈 수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하고 학교에서 가르칠 선생들의 수준을 높여야하는 것이다. 학교짓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교육의 질에,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것을 즐겁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점심시간 먹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학교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말이다. 선진국의 국가들은 눈에 보이는것에 지나지 않는 성과제 ODA사업에 대해 다시한번 심사숙고 해야할 것이다.
다음에는 서아프리카 권에서 더 작은 국가로 가거나 더 큰 국가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배운 역사대로라면, 포르투갈에 흑인이 노예로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침략이 시작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부족과 부족 사이에서 싸움이 나게되면 진 부족이 이긴부족의 노예로 가는 것이 전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 누군가 본인의 노예를 선물로 주었을 것이고 포르투갈인들은 오호라! 하고 덥석 받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후 노예 수요가 부족하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총을 선물로주며 더, 더 많이 노예들을 잡아오라 한다. 손안대고 코풀기를 한 셈이다. 총을 넘겨받은 부족들은 힘이 더욱 강해져 자꾸만 이겼을 것이고 신나게 팔았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과연 잘못한건 유럽인들 뿐이었을까? 노예시장의 핫스팟이었던 고레섬이 있는 세네갈, 가장 막강했던 월로프족이 대부분인 세네갈, 내가 처음 이곳에 와 홀로 상상하고 느꼈던 부분에 대해 더 깊은 역사가 힘이 막강한 큰 부족인 뿔, 월로프,세레부족 말고 그 이상의 소수부족의 전통과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한것이다. 멀지 않은 시간속에 하얀뚜밥이야기 시즌2가 시작되길 고대하고 고대해 본다.
임기2년을 마치며 분명 나는 많이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달랐을 뿐이고 몰랐을 뿐이라는걸 알았다. 사실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닥치면 욱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 쉬운 일이고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것을 가장 크게 배웠다. 틀릴 수 있고 실수 할 수 있다. 어릴때부터 정답이 있는 수학을 좋아했던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길이었던 완벽하지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해 많이 느끼고 배운 것 같다. 12시간 뒤면 비행기타고 떠나버릴, 하얀 뚜밥의 이야기 이렇게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