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 영혼 찾기
#1
언덕 밑에서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촤르륵 펼쳐진 계단이 내 숨을 멎게 한다.
“저 계단을 언제 다 오르지.”
생각을 삼키기도 전에 발은 먼저 계단을 밟는다.
막상 한 계단을 밟아 보니 두 번째 계단을 밟는 건 어렵지 않다.
열개쯤 거뜬히 밟고 나니 나머지 계단은 고단하지만 쉬워 보인다.
허벅지 윗 근육이 움직이는 걸 느끼며 처음 마냥 고개를 다시 들었더니
오르기 시작하던 순간보다 하늘이 가까워졌다.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본다.
생각보다 땅과 내가 멀어진 걸 알게 된다.
무엇보다 달라진 공기 냄새를 만끽하며 다시 계단을 밟기 시작한다.
언덕을 오르는 것도, 땅에서 멀어지는 것도, 하늘과 가까워지는 것도.
어떠한 것도 내겐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시작하는 것.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막상 밟기 시작하니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일상처럼 말이다.
#2
그와 내가 가까워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원해 가까워지고 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삶의 대부분의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멀어진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당신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알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절실한 시기에 적절하게 나타났으며
내가 원하면 것 이상의 순수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기가 막히는 여자 친구를 원하는 시기였기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 만족하며 서로에게 충실하였다.
그러한 그와 내가 멀어진 건 역시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원했다. 그는 안정을, 나는 모험을 원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모험으로 빚어진 나의 영혼을
그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해서 우리는 멀어졌다.
멀어지기 위해 울었으며
더욱 멀리하기 위해 반대의 방향으로 달렸다.
가까워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걷던 걸음을 돌려
원래의 모습을 향해
처음보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3
간단하게 수식화 해보면 나는 나의 삶에서 그와 나의 삶으로 0.3km 정도 직진했고 그의 삶으로 가는 거리가 0.5km 정도 더해졌기에 원래의 나, 과거의 나로 회귀하기 위해선 0.8km나 되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처음엔 쉬울 줄 알았다. 원래의 나는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의 내가 되기 위해서는 기록된 무언가가 있어야 했는데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던 것이었다.
#4
좋아하는 그림을 보고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희생이라 생각했던 관계의 단절을 회복하며 그렇게 난,
원래의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 나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
그렇게 나의 영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5
그 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갑자기 베토벤 심포니가 듣고 싶었고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높았으며 바람은 여름날의 미풍처럼 시원했지만 서운한 기운을 주는 그런 이상한 날이었다.
예정에 없던 음악회 티켓을 들고 찾아간 예술의 전당은 봄날의 전시가 한창이었다.
마침, 로스코 전시도 한창이었기에 이별로 인해 잊고 있던 로스코 전시를 우연한 기회에 볼 수 있게 되었다.
Red and Orange, Mark Rothko, 1955
“흰 코트가 참 잘 어울리네요. 저도 그런 옷 좋아하는데 남자 옷은 도통 그런 옷이 없더라고요.”
“아, 어떤 사람들은 목욕 가운 같다고 하던데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햇살에 눈이 부시네요. 코트에 반사되는 빛이 눈이 부셔요. 옷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아… 저 때문일 거예요. 하하”
우리의 첫 데이트는 리움이었다. 눈이 녹을 만큼 찬란한 햇살이 눈부셨던 겨울의 끝자락을 걸으며
닿을 듯 말 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미술관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 예술의 전당에서 로스코 연극하던데. 혹시 로스코 아세요?”
“로스코요?”
“네, 러시아계 미국인인데 현대미술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라는데…”
“그럼 보러 갈까요?”
“네, 좋아요. 그럼 연극 보기 전에 먼저 로스코 그림을 봐야겠어요.”
“네, 좋아요.”
그렇게 우린 로스코 그림 앞에 서게 되었다.
혼자 볼 땐 별다른 감정이 없던 그의 그림이 미묘한 설렘을 안고 다시 바라보니 새로웠다. 마치, 뛰고 있는 나의 심장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6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누군가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사람의 눈을 피해 가며
어두운 천막 사이로 들어간 나는 처음으로 보는 형태가 있는 로스코의 그림을 보며 짐짓 당황스러웠다.
그는 오로지 Red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붓질을 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의 색 이면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결합과 여러 실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허리가 긴 여자의 형태, 구름 같은 덩어리들의 결합,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듯 각기 다른 색으로 존재하는
형태들 등등.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그림은 형태가 없는 색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7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삼면이 그림으로 둘러싸인 공간,
길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혼자 앉아 울고 있었다.
애매한 경계를 응시하며 서로 다른 색이 같은 색처럼 보인다는 건 얼마나 억지스러운 건지
서로 다른 개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선 더 강렬한 색이 조금의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
만약, 미량의 검정이 섞이기라도 하면 저 모든 색은 검은색이 돼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
처음에는 그 딱딱한 의자가 너무 불편해서 앉기 조차 싫었지만
앉고 나니 이러한 문장들이 떠올랐고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의 세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잃었던 나를 조우하게 되었다.
로스코 그림에 둘러싸여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죠? 색과 색의 경계를 실눈을 뜨고 응시하는 나의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여줄 순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