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guous Dance Company _엠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남편을 보내고 불편한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 채널을 돌리다가 생전 깔아본 적 없는 유툽 앱을 깔고 애플 티비로 로그인을 하고 요즘 앰비규어스는 뭐하나, 궁금해서 채널을 뒤적뒤적. 국악과 콜라보레이션 하는 것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의 내가) 이 정도로 기가막힌 공연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며 멍하게 그들을 보았다. 아마 김보람과 아이들쯤으로 데뷔했어도 장기하보다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입고 있는 파자마를 벗지도 않고 누군가가 깨끗하게 정리해놓은 거실 구석에 앉아 손을 뻗으면 뭐든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시대를 사는 내 자신이 어찌나 게을러 보이는지 자책하고 말아버렸다. 보는 내내 듣는 내내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들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수고가 나는 왠지 감각할 수 있는 것 같아 언제나 그들의 공연은 내 망막을 적신다. 최근 김승옥의 소설을 우연히 만나 보고 또 보는 중인데 어쩌면 한국인이라는 거,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움직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 혹은 Confession-참회 혹은 고백- 에 다다르게 하는 흥분이 있다. 뭐든지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상태, 누구든 잡고 아, 내가, 이런 게 너무 후회돼요. 아, 내가, 이런 게 너무 하고 싶었어요. 아, 내가, 이런 걸 하지 못해 어떡하죠? 라고 지나온, 어쩌면 바로 직전의 시간, 그 시점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텅 빈 집에 홀로 앉아 70인치쯤 되는 티비로 그들을 보며 웃고 울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다시 주저 앉고 아, 땀냄새. 아, 숨소리. 아, -미안하지만- 힘들고 거친 그 소음이 듣고 싶다고 되뇌인다. 그리곤 미래를 생각한다.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할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로 귀결되는 그 자책점은 나로 하여금 살아있음을, 그리고 숨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한다. 모처럼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 창밖으론 뜨거운 바람이 불고 나는 올지도 모르는 그 미래를 곱씹으며 바람을 본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