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뜨거운 회장 선거

생생한 정치 교육이란 이런 것

by 최영훈

2월 말에 조합장 선거 일이 들어 왔습니다. 3월 13일이 모든 조합장 선거일이었으니까요. 우리 팀은 지역의 축협 조합장 선거일을 맡게 됐죠. 그러나 이보다 더 치열한 선거전은 따로 있더군요.

은채는 입학 전부터 반장이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아빠로써는 학교 일에 발 벗고 나설 형편이 안 되는 터라 반장은 학교 일에 적극적인 부모를 둔 아이가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은채한테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내가 주변 지인들에게 반장 얘기를 물었더니 저학년 때 반장은 큰 의미가 없으니 고학년 때 반장에 도전해보거나 학생회장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을 했답니다. 아내는 은채한테 이 얘기를 들려주고 나중에 학생회장에 도전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었죠.


은채는 당연히 학생회장이 뭔지 물었습니다.

“아. 그거. 반장은 한 반의 친구들을 대표해서 반 친구들을 도와주는 거고 학생회장은 학교 전체, 학생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이야.”

은채는 이 설명을 듣더니 자기는 이제 학생회장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린 아직은 먼일이니 응원하겠다고 격려를 하고 대화를 끝냈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나중에 안 얘기지만 은채의 초등학교에서는 2학년 때까지는 반장을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죠.


등교 2주에 접어들던 어느 날. 아내가 은채를 바래다주고 와서 학교가 시끄러워졌다고 했습니다. 얘기인즉슨 학생회장 유세전이 본격화 됐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진지하게 포스터를 만들고, 대학 총학생회장 유세전처럼 등굣길에 양쪽으로 나열해서 회장, 부회장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며 한 표를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이들이 포스터를 국회의원 선거 뺨치게 만들었다고, 패러디도 기가 막히게 했다고 놀라워했습니다. 직업상 선거철마다 후보의 홍보 책자를 만들고 슬로건을 써 줬던지라 아이들이 잘 만들면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유세를 하면 얼마나 하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보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아내의 호들갑이 있었던 다음날, 오후에 은채를 데리러 가는 길에 학교 본관 건물에 입구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살펴봤습니다. 한 후보는 영화 <극한직업> 포스터를 절묘하게 흉내 내어 사진을 찍고, 극 중 유명한 대사를 살짝 바꿔 “지금까지 이런 회장은 없었다. 극한 회장”이라는 카피를 써 놨습니다. 다른 후보들도 나름 공을 들여 사진을 찍고 슬로건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등교는 아빠가 해줬는데 실제로 본 유세전은 대학 총학생회장 유세전의 열기를 이미 넘어 섰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학에서의 유세라는 것이 기껏해야 대학 정문 앞에 후보별로 운동원들이 나열해 서서 90도로 인사 하며 후보의 기호, 슬로건, 이름을 연호하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운동권 후보들은 민중가요에 맞춰 단체 율동을 하는 게 추가되는 정도였죠. 그러나 이 친구들은 후보의 포스터를 높게 들거나 좌우로 흔들면서 후보자의 이름, 기호, 슬로건을 큰 소리로 외쳐댔고, 후배들-등교하는 학생 대부분이 당연히 후배겠죠? - 에게 다가가 지지를 적극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예상 밖의 열기에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초등학교 학생회장은 공부 잘하는 선배 몇 명 후보로 나와서 조회 시간에 연설을 했던 게 전부였던 거 같습니다. 심지어 투표를 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 다음날 은채가 집에 와서 재미있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이 후보들이 학교 방송을 통해 공약을 발표했다는 겁니다. 은채는 이 공약 발표를 유심히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도서관 이용에 관한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투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투표권은 3학년 이상부터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은채한테 이 얘기를 해주니 본인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전 군사정권 시절에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고, 검정고시를 거쳐 문민정부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중학교 때 학생회장 선거가 어떻게 치러졌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선거 참여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던 16대 대선이 최초입니다. 그러니까 서른 전까지는 사실상 참여하는 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죠. 그러나 은채는 이미 선거전의 열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후보의 공약을 꼼꼼히 듣고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공약을 발표하는지 따져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투표권이 없어서 아쉽지만 이를 바탕으로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할지도 정했죠.


전 이런 직접 선거를 통한 정치 교육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물론 건너들은 말로는 중학교 때까지는 친구들한테 인기 있고 활달한 친구들이 요직을 독점한다고 하지만 어찌됐든 아이들이 학교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대표를 직접 뽑는 경험을 일찍 한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대학 내에서의 정치 참여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 될 테고, 더 나아가서 국가의 정치 참여, 즉 국민 주권의 행사도 당연한 권리라고 인식 될 테니까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는 진짜 말 그대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터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허울 좋은 구호에 그쳤던 시대를 지나 진짜로 학교 정치에 참여하면서 말이죠. 구호가 실천이 되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요즘 은채의 학교를 보며 새삼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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