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선 방황해도 된다.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24

by 최영훈

노트북을 다루다.

열 살이 되자 연초부터 진지하게 노트북을 제 것 인양 쓰기 시작했다. 아빠의 십몇 년 된 노트북을 딸한테 줬더니 IT업계 차장님인 외삼촌이 심폐 소생시켰다. 그렇다고 무슨 보고서를 쓰는 건 아니고 그저 한글 타자 게임을 하고 있다. 한번 독수리는 평생 독수리로 살 수 있으니 타자부터 연습하라고 했더니 그 뒤로 나름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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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컴퓨터를 본 건 1995년이었다. 그 이듬해 기숙사 선배의 486 컴퓨터를 중고로 샀다. 그렇게 컴퓨터와 인연을 맺었다. 대학원 갈 때 처음으로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고, 집에 컴퓨터를 들여놨다. 세이클럽으로 채팅의 재미를 알면서 타자가 늘었고, 게임은 안 했지만 웹툰은 종종 봤다. 마린 블루스, 강풀, 강도하 등의 작품을 봤다. 그러니까 내가 이십 대 후반에 접한 것들을 은채는 열 살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방법은 뭘까?

책도 마찬가지. 은채는 나보다 훨씬 빨리 접했다. 매 방학마다 첫 행사는 서점 나들이다. 3학년 봄 방학 때도 그랬다. 과거 출판 계약할 때, 그 출판사로부터 선물을 받았으나, 관심 밖이던 책과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다른 책 몇 권을 팔고 딸이 읽고 싶어 하는 책 몇 권을 샀다.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까?>, <시가 말을 걸어요.>를 샀다. 특히 보리 출판사의 식물도감은 나도 탐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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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린 시절에는 부모들이 애를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 몰랐다. 대학 나온 부모가 1/3도 안 됐을 테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고학력 축에 들었던 시절이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엔 백과사전과 전집이 유행했다. 계몽사 등에서 수십 권짜리 어린이 백과사전이나 위인전집, 세계문학전집 등을 내놨다. 영업 사원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알음알음 영업을 통해 이웃에서 이웃으로 비슷한 전집들이 꽂혔다. 우리 집에도 그렇게 백과사전과 위인전집 따위가 있었다. 책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아무리 만화로 된 과학 책, 역사책이라 해도 같은 걸 수십 번씩 읽다 보면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새 책을 살 돈이 없으니 중학교 때부턴 친구들한테 책을 빌려 읽었다. 헤르만 헤세도 그렇게 읽었다. 몇몇 시집도 그렇게 동냥하듯 읽었고.


서점을 배회하며 제대로 책을 사기 시작한 건 스물이 넘어서였고, 나름의 지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일관성 있게 책을 사기 시작한 건 스물넷,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다. 그러나 불행히도 들어간 학과의 1기였던지라 무슨 책을 읽으라고 가르쳐준 선배가 없어서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내려온 강사들이 무심히 던진 몇 마디를 귀담아듣고 메모한 걸 들고 서점을 헤맸다. 그렇게 차곡차곡 책이 쌓여 갔다. 카피라이터가 된 이후에는 마케팅 이론과 광고 관련 전문 서적, 트렌드를 따라갈 책과 경제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이때도 사수가 없는 회사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듯이 책을 읽어 나갔다. 고독한 독서가의 탄생은 그렇게 멘토 없는 방황에서 시작됐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딸과 같이 서점에 가지만 이걸 읽어라, 저걸 읽어라 하진 않는다. 친구에게 듣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눈여겨본 책을 찾고 있으면 어디에 있다고 알려줄 뿐이다. 딸은 그렇게 서가를 서성이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면 그걸 꺼내 들고 읽고 다시 꽂아놓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맘에 드는 책 서너 권을 챙겨 아빠에게 가져온다. 되도록 다 사주려 하지만 너무 성의 없이 만들어졌거나, 내용이 부실한 책은 분명한 이유를 말해주고 다른 걸 골라보라고 한다. 아이는 납득하고 서가로 다시 가서 서성거리길 반복한다. 그렇게 제 나름의 책을 보는 안목을 만들고 있다. 이 또한 나보다 십몇 년은 빠른 것이니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