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배우는 것들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27

by 최영훈

세상에 똑같은 사찰은 없다. 사찰엔 불교의 기호와 목수의 실력과 취향이 절묘하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 요 몇 년 사이 가 본 사찰 중 인상 깊은 곳을 꼽으라면 합천의 해인사는 물론이고 선무도의 본관인 경주 골굴암, 단청 색이 바랜 기림사, 아늑한 석남사, 목어가 보기 좋은 은하사가 좋다. 그중 최고를 꼽으라면 밀양의 표충사다. 등에 진 암벽의 기운은 사나운데, 산자락이 병풍처럼 절을 감싼다. 엄한 아버지의 따뜻한 품과 같다.


거제도와 여수 여행

3학년 개학을 앞두고 떠났던 여수 여행 중엔 향일암을 찾았다. 이제껏 가본 사찰 중 그 오르는 길이 가장 예사롭지 않다. 작은 암자의 내려 보는 기세가 남해의 기운을 누르고도 넉넉했다. 거센 바람결에 동백은 붉었고 바다는 사나웠다.

KakaoTalk_20220424_152304997.jpg 저 좁은 곳을 통과해야 향일암에 닿는다.

두 여자는 사찰 곳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계단에선, 가지각색 모양을 한 동자승 조각을 흉내를 내며, 몇 계단 내려올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어지간하면 사진 못 찍는 아빠이자 남편에겐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안 한다. 두 여자 사진을 찍을 때마다 종종 술이 덜 깬 손이 흔들려 혼나곤 해서, 결국 어디로 여행을 가든 난 자료 삼아 풍경을 찍거나 건축물을 찍었다. 이날은 그래도 손이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이 흉내 내는 재미에 빠져 있어 열심히 찍어줬다. 희한하게도 조각상을 흉내 내려 눈을 가리니 떨리던 손이 멈춰 한 장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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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떨렸다고 타박하는 딸이지만 맥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여행지의 낯선 마트에서 같이 맥주를 찾아준다. 여수에 가기 전 거제도에서 하루 묵었다. 그때, 지세포의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렸었는데, 집 근처 편의점에선 구하기 힘들었던 곰표 맥주가 잔뜩 쌓여 있었다. 같이 편의점 갈 때마다 허탕 치던 아빠를 딱하게 기억하던 딸이 먼저 발견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아빠와 엄마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넉넉히 맥주를 사고, 싱싱한 가리비를 한 바가지 샀다. 딸은 거제도의 풀빌라에서 하루 종일 수영을 하는 중간중간 가리비를 다 먹었다.


여행하며 함께 배운다.

아이의 여행은 진화한다. 네다섯 살 무렵엔 제 취향에 맞춰 놀이공원, 동물원, 수족관, 테디 베어 박물관이나 키티 박물관 등을 찾아다녔다. 부산 인근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경주에서도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딸이 나고 자란 곳이 부산시립박물관 앞 동네다 보니 박물관에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예닐곱 살이 되자 어느 도시를 가든 박물관은 당연히 가봐야 되는 곳으로 여기게 됐다. 어린이 박물관을 따로 운영하는 박물관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해설사와 함께하는 고궁 투어 등을 했다. 문제는 엄청나게 큰 국립중앙박물관도 다 돌아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 아이의 열정과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부모 역시 바닥에 있는 체력까지 길어 올려 따라가 줘야 한다. “어이 딸, 그거 책에 다 나와.”하는 멘트가 목구멍까지 신물처럼 올라와도 “꾸욱” 참아야 한다. 아빠의 인내가 아이의 세계를 넓힌다.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으며 왔다 갔다 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자신만의 호기심을 품고 낯선 도시를 누비는 여행자로 만든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아빠지만 사찰과 같은 고건축물 보는 건 좋아한다. 이 골목 저 골목 들어가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걸 아는 엄마는 연애할 때부터 그런 장소를 미끼로 꼬드겨 아빠를 비행기에 태웠다. 이런 아빠 때문에 은채 또한 아빠와 함께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제법 큰 사찰은 다 가봤다. 각 건물의 이름과 보살상의 차이도 함께 공부하고 범종과 목어도 함께 구경했다. 사찰을 향해 숲길을 걷는 동안 만나게 되는 다람쥐와 계곡의 물고기도 구경했다. 아빠가 아는 나무와 꽃, 물고기의 이름과 개수가 뻔하다 보니 결국 이전에 말했던 도감도 사게 됐다.


아빠라고 다 알 수 없다. 제 아무리 명문대를 나오고, 복수 전공에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식의 분량은 뻔하다. 반복되는 일에 치이다 보면 알 던 것도 까먹는다. 그러니 아이가 크면서 아빠도 함께 공부하며 커야 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한옥의 명칭도 공부하고 사찰의 구조도 어설프게라도 알려했다. 왜가리와 두루미를 구분하게 됐고 청둥오리와 가마우지도 구분하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건 모른다. 특히 요즘엔 회를 좋아하는 딸이 회 한 점 들어 올려 앞에 들이대며 “아빠, 이건 무슨 물고기야?”하고 물으면 난감하다. 늘 회를 먹으면서도 왜 썰어 놓기만 하면 무슨 물고기인지 모를까?


아직도 아이와 함께 알아갈게 많다. 어느 순간엔 내가 아이에게 묻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기계, 그리고 변하는 세상을 관통하며 다가오는 낯선 것에 대해. 내가 인내심을 갖고 딸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줬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자기 또한 그리 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