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28
"다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본인 몸에 만족하세요?",
"일도 사랑도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없어요. 유일하게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제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게 몸밖에 없더라고요." 모델 한혜진이 한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혜진의 저 말은 평소 내 운동 동기이기도 하다. 사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그나마 꾸준히 노력해서 변화를 일으켜 달라진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내 몸뚱이 하나뿐이다. '우울할 땐 고기 앞으로가 아니라 쇳덩이 앞으로', 또는 '조깅화를 신고 길바닥 위로'가 내 모토였다.
딱히 가진 게 없다.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차도 없고, 집도 없다. 가진 거라고는 지난 이십 년간 해온 업을 통해 체득된 것뿐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이 일 또한 가장 중요한 밑천은 몸뚱이라고 확신하기에 그 도구를 갈고닦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몸의 긴장이 풀리면 머리의 긴장도 풀릴까 염려되어서였다. 게다가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자기 몸뚱이가 맘에 들면 계절마다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할 일도 없고, 명품 따위도 필요 없지 않을까?
딸에게 공부나 예능 같은 걸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맨몸 운동은 꼭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가르쳤다. 웜 업부터 유산소, 상 하체 운동, 마지막 마무리 스트레칭 등등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타바타를 위한 타이머 애플리케이션도 다운로드하게 해서 십 분에서 이십오 분 가량 제대로 몸을 괴롭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어떤 상황, 어디에서든 운동을 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일전에 썼듯이, 3학년이 되면 딸에게 농구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몇 달 만에 마트에 가서 공을 샀다. 농구를 시작한 것은 3학년이 되던 해, 2월 말부터였다. 아빠가 대학 때부터 쓰고 다니던 빨간 모자를 돌려 쓰고 씩씩하게 십오 분을 걸어 코트에 도착했다. 스트레칭을 시키고 코트를 두세 바퀴 뛰게 했다. 공을 이렇게 저렇게 만져보게 했다. 두 손 사이에 공을 두고 혼자서 주고받아보라고 했다. 허리둘레로 공을 돌려보는 것도 시켰다. 기마자세로 서게 한 뒤 두 다리를 축 삼아 8자를 그리며 공을 집어넣고 빠져나오게 하는 것도 시켰다. 그렇게 공과 한참 친해지는 시간을 가진 뒤 드리블과 패스의 기본을 가르쳤다.
딸은 슈팅도 해 보고 싶어 했다. 림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슈팅을 시켜 봤다. 슛이 짧았다. 몸 전체를 쓰는 법을 가르쳐줬다. “딸, 팔로만 던지면 안 돼. 몸 전체가 저 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굽혔다가 점프하면서, 몸이 부우웅 뜨는 느낌을 가지면서 공을 보내야 돼. 공으로 림을 맞추는 게 아니라 네 기운이 림으로 쏘옥 들어가는 거야.”
말귀를 알아들었다. 몸 전체를 쓰기 시작하면서 리듬을 찾아갔다. 타고난 거리감도 좋았다. 그래도 슛은 들어가지 않았다. 몇십 번을 했을까? 좀 더 했다가는 내일 팔을 못 들 것 같았다. 견갑골과 어깨, 겨드랑이가 욱신거릴 것 같았다. 그만하고 집에 가자는 소리가 입술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딸은 진지했다. 한 골이라도, 꼭 넣고 가고 싶어 했다.
결국 한 골이 들어갔다. 딸이 그런 함성을 내지르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환희에 찬 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버저비터 3점 슛을 넣은 선수의 모습이었다. 딸은 그 이후로 일요일만 되면 농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이래저래 피곤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 못 걸어도 6,7 천보 정도 걷는다. 딸과 등하굣길을 동행만 해도 그 정도 된다. 다 해봐야 30분 정도나 될까? 내가 걷는 동안 당연히 딸도 걷는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학원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온다. 해운대 센텀 시티의 중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지하철 타는 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 나이 때까지 한 번도 지하철을 못 타본 애들이 많아서라고. 난 딸을 걷는 인간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한 코스 정도는 걸어도 될 만한 거리로 인식시키려 한다. 딸이 입학한 뒤 함께 열심히 걸은 탓인지 난 살이 3킬로 정도 빠졌다.
다큐멘터리 영화 <내일>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백 킬로그램도 안 되는 인간이 이동하기 위해 1톤짜리 자동차를 타는 것이 합리적인가요?" 애가 환경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 많이 걷게 한다. 걷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만 돼도 지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난 딸이 외모를 꾸미는 것만큼 보이지 않는 곳도 가꾸고 다듬을 줄 알기 바란다. 몸을 써서 자기 몸을 만들고, 그 몸으로 길을 걸어 나가고 일과 인생, 글도 밀고 나가길 바란다. 김훈 선생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신체는 인 생을 짊어지고 가는 유일한 도구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감사함과 냉정함이 공존하길 바란다. 때로는 자애로운 엄마처럼, 때로는 냉혹한 트레이너처럼 자신의 정신과 몸을 대할 줄 알았으면 한다. 그런 이유로 요즘도 함께 농구하고 운동하고 걷는다. 1킬로 정도는 일상처럼 걸어서 서점에도 가고 학교에도 간다. 30분 정도 걷는 건 아주 짧게 걷는 것임을 인식시켜려 한다. 우선은 자신을 위해, 크게는 이 지구와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