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살 수 없는 이유

by 최영훈

제가 갖고 싶은 책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책을 읽고 싶을 만큼 읽을 수가 없어서였겠죠. 어린 시절 집이 워낙 가난해서 네 식구가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는데, 심지어 십대에 접어들어 살기 시작한 의정부에서는 이사를 열 번 가까이 했으니까요. 그러니 이사할 때 무거운 짐이 되는 책을 사들이는 건 허락될 수도 없었고, 살 돈도 없었죠. 게다가 책꽂이는커녕 책 한권 놓는 것도 사치인 단칸방 생활에 책이 차지할 공간, 책을 읽을 공간을 마련하는 건 사치였죠.


중학교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가장 큰 가구는 아버지의 철제 사무용 책상이었습니다.

그 낡은 철제 사무용 책상을 왜 몇 년 간 이사 갈 때마다 끼고 다녔는지 지금 돌아보면 이해가 안가지만 더 웃긴 건 그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죠. 가구다운 가구를 산 건 집안의 풍파 끝에 어머니와 단 둘이 평택에 살게 되면서부터였죠. 그때 처음 어머니는 저를 위해 책꽂이와 오디오를 사주셨죠. 저에 책 수집은 바로 그 때, 스물이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스물넷이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 간 뒤부터 불이 붙었죠. 음악 CD를 사 모은 것도 이때부터였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습니다. 일주일 용돈이 3만원인가 했는데 잠은 기숙사에서 자고, 밥은 학교 식당에서 천 원짜리 밥을 먹으면서 돈을 아껴 CD나 책을 사곤 했죠. 당시에는 신용 카드가 흔할 때가 아니어서 모든 결제는 현찰로 해야 해서 용돈 안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사고 싶은 CD와 책 들 중에서 어떤 걸 살지 고르고 고민하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은채랑 서점에 가면 전 은채가 사고 싶은 책을 다 못 사게 합니다. 예를 들어 코키 폴의 <마녀 위니> 시리즈가 여러 권 있으면 그 중 갖고 싶은 거 두 어 권만 고르게 합니다. 백 권이 넘어 보이는 <마법의 시간 여행> 시리즈나 <신기한 스쿨버스> 시리즈 중에서 여러 권을 꺼내 읽어 맘에 들어 해도 그 중 가장 사고 싶은 거 두 어 권을 선택하게 하죠. 이것이 아빠의 가난에서 비롯된 버릇인지, 아니면 나름의 철학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에 독서 습관과 책을 모으는 취미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늘 이런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취직해서 돈을 벌면 꼭 니체 전집을 사야지.”

“여유가 생기면 민음사 문학전집을 한 번에 사들이자.”

“앞으로 나온다는 프로이트 전집을 꼭 사자.”


물론 이런 다짐은 실천 되지 않았습니다. 취직하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관심사는 늘 변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만약 취직하자마자 니체나 헤겔, 프로이트의 전집을 샀으면 그 전집이 주는 무게로 인해 다른 책을 살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지금도 책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책상을 점령하고 있는데 사고 싶은 책은 계속 생기니 선참으로 들어 온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니까요.


은채의 관심사는 아빠보다 훨씬 빨리 변합니다.

중고 서점에 가서 몇 번에 걸쳐 산 <Why 시리즈>들의 주제는 인체, 남극/북극, 바다, 갯벌, 물고기 등입니다. <마법의 시간 여행> 시리즈들의 주제는 사라진 공룡, 끝없는 우주, 고대 그리스 올림픽, 이집트의 피라미드입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책들의 목록만 봐서는 이 사람의 직업이 뭔지, 취미가 뭔지, 전공이 뭔지 당체 종잡을 수 없겠죠. 그러나 은채의 입장, 어린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목록의 혼란은 당연합니다. 은채에게 세계의 대부분은 아직 미지의 세계이고 미스터리한 영역이 훨씬 많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때그때 궁금한 것들의 궤적을 따라 살 수 밖에 없고 그 궤적은 어느 날 뚝 끊기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궤적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또 내용이나 주제, 소재는 비슷해도 저자마다 내용의 선택이 다르고 출판사마다 편집의 방향이 다르고 목차의 구성이 다르니 같은 내용이라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구매를 하거나 빌려 읽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저 또한 제가 아는 작가나 학자의 책은 오히려 온라인에서 구매하지만 모르는 작가나 책은 오프라인 서점이나 중고서점에서 구매를 합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데 구매 후기나 남이 남긴 서평만 보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전 은채에게도 스스로의 지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르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나 소재를 선택하고, 그걸 가장 잘 쓰고 표현하는 저자나 출판사의 책을 찾아내서 자신의 책의 세계, 더 나아가 자신의 지적 취향과 소양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말이죠.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서 그 세계의 결핍이 인식 되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 미로 같은 서점에서 헤매고, 온라인 중고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절판 된 책이나 희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 틈틈이 검색하고, 결국에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어슬렁거릴 때가 오겠죠.


전 은채가 자신만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만들고 모두가 아는 작가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를 찾아내고 그 작가를 아끼는 독자로, 지식인으로, 또 생활인으로 크길 바랍니다. 은채의 지적 세계가 전집이 아니라 이렇게 도서관과 서점에서의 발품으로 서서히 구축되어가길 바랍니다. 그 세계가 <영원히 사는 법>에 나오는 그림처럼 화려하면서도 다채로운 다양성으로 형성되길 바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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