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지막 주
3월 마지막 주에 은채가 사고를 쳤습니다.
사고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목요일엔 방과후 교실에서 바이올린을 배웁니다. 이 시간에 은채랑 친한 반 친구인 하영이와 어린이집부터 친구였던 전지유-지유라는 이름을 가진 은채의 친구가 두 명이어서 은채는 꼭 성을 붙입니다. -가 함께합니다. 사건은 이 시간이 끝나고 나서 터졌죠. 방과 후 교실이 끝나고 나서 하영이는 엄마가 데리러 왔고, 은채와 지유는 돌봄 교실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영이가 은채와 지유를 유혹했죠. 학교 뒤에 있는 문방구에 가자고 말이죠. 하영이는 엄마한테 받은 3천원이 있었죠.
그런데 때 마침 은채의 코트 주머니에는 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이었죠. 보통은 그런 큰돈은 엄마에게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맡기게 되는데 엄마가 깜빡했던 모양입니다. 은채는 학교 근처에 문방구가 있던 걸 몰랐는데 하영이 때문에 알게 되자 소위 이성이 마비됐고, 모든 상황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했죠.
‘갔다 오기 충분한 시간일거야.’
‘이 정도 돈은 써도 될 거야.’
‘하영이 엄마가 허락해줬으니까 괜찮을 거야.’
결국 은채는 문방구에 갔습니다. 문방구에 가서 필기구나 학용품을 샀다면 어쩌면 대형 사고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죠. 물론 문방구를 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형 사고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돌봄 교실 선생님은 시간이 되도 오지 않는 두 명의 아이 때문에 놀라셨죠.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하시니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잠시 늦는 걸로 아이들의 엄마 휴대폰으로 전화를 할 수도 없었죠. 결국 아이들은 조금 늦게 돌봄 교실에 들어 왔습니다. 마치 이날 체육을 했는데 아이들은 체육관에 가는 대신 교실에 남아서 반성문을 썼습니다.
마침 그날 아내와 같이 은채를 데리러 갔는데 엄마랑 나오는 은채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모녀가 동시에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말은 이랬습니다. 돌봄 교실에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공책 두 권을 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써진 은채의 반성문을 보여주셨죠. 이어서 자초지종, 즉 은채와 지유의 문방구 일탈 사건을 설명해주셨고요.
은채는 이날 문방구에서 3천 원짜리 슬라임 제작 키트와 천 원짜리 슬라임을 샀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던 지유의 슬라임 가격 천원을 대신 내줬고, 거스름돈이 없으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삼천 원 밖에 안 가져왔는데 삼천 원짜리를 산 하영이를 위해 천원을 빌려 줬습니다. 결국 은채한테는 4천 원 밖에 남질 않았죠.
여기까지는 웃고 넘어 갔습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너무 모범생 같은 딸이 이런 일탈을 과감히 했다는 것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나 아내나 학창시절엔 모범생 축에 속 했는데 그런 우리의 시각으로 봐도 은채는 그야말로 너무 FM적인 딸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집에 와서 터졌습니다. 은채가 집에 와서 가방을 정리하는데 천 원짜리 액체 슬라임의 뚜껑이 열리면서 가방 안쪽을 적시고, 학교 소식을 담아 오는 파일과 그 안에 학교 소식이 담긴 대천 소식이라는 소식지의 일부가 젖었으며, 심지어 은채가 대출 받아 온 책 일부에도 슬라임이 묻었던 것이죠.
저나 아내나 자기 물건이나 학용품을 낭비하고 잃어버리는 건 혼냅니다. 은채가 돈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고, 심지어 물건을 살 때도 자기는 고르기만 할 뿐 돈을 직접 내지 않으니 물건의 가치는 물론이고, 돈의 가치, 더 나아가 노동의 가치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소중함으로 그것을 가능케 한 돈의 가치, 돈을 벌어 온 노동의 힘듦과 부모의 수고 등을 간접적이나마 알게 하려는 것이죠.
저와 아내는 그야말로 불 같이 화를 냈습니다. 저는 소중한 학교의 책을 더럽혔다는 데 먼저 화-제 책만큼 남에 책이 망가지는 것에도 무지하게 화가 납니다-가 났고, 미국 할머니가 한국에 들어오시면서 일부러 사 오신 가방이자 매일 들고 다니는 소중한 책가방을 더럽혔다는데 저와 아내 모두 화가 났습니다.
은채는 단단히 혼이 났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반성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책과 가방을 수습했고 다행히 원상 복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은채는 자기 방에서 많은 생각을 했죠. 그리고 엄마와 딸은 딸의 방에서 아주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건으로 전지유, 오하영도 크게 혼났다고 합니다. 전지유는 선생님한테 엄마한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안 사실인데 지유네 집은 대대로 경찰 집안이라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거든요. 또 하영이는 친구들에게 “바이올린 선생님이 좀 더 연습하라고 해서 방과 후 교실이 늦게 끝났다고 하면 돼.”라고 변명 거리를 창작해줬다는 걸 엄마한테 얘기하는 바람에, 거짓말을 창작하고 가르쳐줬다는 이유로 엄청 혼났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 사건을 들으며 전 약간 안도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전 십대 시절을 아무리 뒤져봐도 친구들과 함께 사고를 친 기억이 없습니다. 워낙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담배는 지금도 피지 않고 술도 스물다섯 쯤, 대학에 들어가서도 일 년이 지나서야 마시기 시작했죠. 대학 4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외박 한번 한적 없고, 규칙을 어긴 적도 없죠. 2학년 때부터는 기숙사 한 동을 책임지는 동장을 맡아서 4학년 1학기까지인가 했기 때문에 대학 생활 내내 일탈과 낭만이라는 건 없었죠.
은채가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사고를 쳤다는 점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자세도 바르고, 늘 단정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라면 적당히 일탈도 할 줄 아는, 그런 용기를 낼 줄도 아는 아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죠.
물론 은채의 엄격한-일곱 시 알람에 바로 일어나고, 저녁 여덟 시에 수학 학습지 숙제를 하는- 원래 성격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 친구들의 다양한 성격의 일부를 자신 안으로 소화해 내겠죠. 그러면서 자신의 엄격한 내적 공간 그 위, 안, 밖 어딘가에 여유로운 작은 공간, 숨 쉴 공간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런 공간들이 있어야 앞으로의 학창생활,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견뎌 나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