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후회는 없다. 젊은 날의 서투름으로 귀한 연인을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있다. 얼마간은 의도했고, 어느 정도는 부지불식간 연인의 마음에 입혔던 상처에 대해서도 후회가 있다. 메마른 오죽(烏竹)을 휘둘러 귀신 쫓아내듯 맘에 없던 말로 연인의 맘을 후려쳤던 것에 대해서도 후회가 있다. 갓 쉰을 넘긴 나이까지 살면서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고백을 못해서 놓친 사랑은 없다. 김동률의 노래처럼 취중에 고백한 적도, 몇 년이 지나서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고민한 적도 없다.
그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따져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처럼 가난하다고 외로움을 모르기는커녕 그 외로움이 더 사무쳤기에 불현듯 나타나 일상을 휘저은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궁핍했던 시절에 사랑만큼은 풍요롭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서예가 취미였던 옛사랑이 직접 붓을 밀어 쓴 글에 담긴 김동명 시인의 <수선화>에 나오는 “부칠 곳 없는 정열을/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을 내게서 본 사람이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애달픈 마음”을 안아주려 선선히 품을 열어주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고백을 한 사람도 받아준 사람도 대책 없이 용감했던 시절이었다. 느리게 간 마음만큼 답도 머뭇되며 왔지만 천천히 타오른 사랑이 오랫동안 식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코노믹 톡 뉴스에 보낸 일흔두 번째 칼럼의 서두다. 영화 시라노(1990)를 소재로 고백에 대해 썼다. 시라노가 끝끝내 자신의 사랑을 숨긴 이유, 편지의 저자임을 감춘 이유에 대해 썼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아니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심리와, 그 비겁함에 대해 썼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이는 그저 추앙의 대상으로 남겨 놓은 채, 자신의 이상향이자 이상형으로 추앙하며 동시에 자신의 주체 또한 전혀 망가지지 않는 가장 안전한 사랑이 짝사랑이고, 어쩌면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아닐까, 하고 썼다.
떠올려 본다.
<화양연화>는 사랑 이야기일까? 두 사람은 사랑을 “한” 것일까?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영화를 처음 본 게 서른 즈음 아니었을까? 그때는 어쩌면, 이 영화를 애잔하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정적(靜的)인 버전, 아시아 버전으로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웃에 사는 남녀의 배우자들이 외도를 하고 있고, 공교롭게도 그 외도 상대가 서로의 배우자라는 사실이 이 이웃 남녀 커플의 연애를 응원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보는 내내 안타까움이 밀려왔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랑을 동사(動詞)로써의 사랑으로 인식 못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충분히 명사(名詞)나 형용사(形容詞)로써의 사랑으로는 인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동사다. 사랑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지난 사랑은 동사가 될 수 없다. 지나간 사랑은 추억이라는 다른 명사의 범주로 분류된다. 왕가위 감독이 이 담담한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 6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건 동사였던 것들이 21세기 홍콩에선 더 이상 그 구실을 이어 나갈 수 없음을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부녀/유부남이 관심과 참견, 친절과 속박 사이의 그 뭔가로 엮인 이웃들의 시선을 피해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굳이 이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 보인 것은 어쩌면 누아르의 전성기 홍콩에서 가능했던 것들을 불가능한 것으로 전락시킬 뭔가의 도래를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독은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그리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든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를 빌려와 이야기함으로써 불가능이 범람할 미래의 홍콩 시민과 모든 것이 가능했던 홍콩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에게 그 홍콩, 모든 것이 가능했던 홍콩, 그 붉게 타올랐던 아시아의 꽃 같던 홍콩을 잊지 말라고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홍콩의 화양연화를 잊지 말아 달라고.
사랑, 동사와 명사, 그 사이
다시 사랑 이야기로 돌아오자. 결국,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동사가 아닌 사랑은 현존할 수 있을까? 미래나 과거가 아닌 오늘 이 순간, 움직임 없는 무엇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오늘, 움직임 없는 사랑은 해석을 원한다. <스펙타클의 시대>에 나온 기 드보르의 표현을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해석은 오늘의 이성으로 어제의 일을 떠올려 앞으로 음미할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다. 이 해석을 위해 우린 과거의 이미지와 말, 텍스트들을 반추할 수밖에 없다. 많은 영화 팬들이 이 영화에 범람하는 소품, 의상, 공간, 음악, 그리고 미장센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동사가 아닌 사랑은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술과 격투기의 차이와 유사하다. 둘 다 적을 상정한 유사한 몸짓이면서도 서로 다른 기준과 차원에서 가치와 의미를 획득한다. 영화 속, 차우는 무협 소설을 의뢰받고 쓴다. 무협 소설은 환상의 세계다. 무협 소설의 주인공도, 그 주인공들이 쓰는 모든 무술도 환상이다. 환상은 이름을 붙이고 해석과 허구적 역사의 각주를 달아야만 생명을 얻어 소설이라는 텍스트에서 살아 움직인다. 마치 보르헤스 소설 속의 거짓 각주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무술의 세계는 형용사와 명사의 세계다. 최소한 지금은 그렇다. 중국의 실전 격투가가 중국 무술의 달인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면서 무술은 예술과 전시의 세계로 급격히 격리되고 있다.
반면 격투는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승패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심판들은 유효타를 세고 두 선수의 적극성을 판가름한다. 깔끔하게 때려눕히면 케이지 안의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키고 승리를 선언한다.
<화양연화>의 사랑은 무술의 세계다. 무협지의 환상이다. 세계의 옷을 벗지 않고, 일상의 이름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마치 볼륨 댄스를 추듯이 밀착하되 밀착하지 않으며 격식 있는 유희를 한다. 첸 부인이 아무리 치파오를 갈아입어도, 매일 정성 들여 머리를 매만져도 거기엔 동사가 될 사랑의 가능성은 없다. 볼륨 댄스의 격식을 위한 장치, 명사인 사랑을 위한 이미지, 해석의 가능성만 부풀릴 뿐이다.
명사로써의 사랑
질문을 바꿔 던진다. 그럼, 명사인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영화는 말한다. 돌아보고 해석하고 음미한 뒤.... 마음이 아프면 사랑이다. 그 시간이, 그 공간이, 그 사람이 그리우면 사랑이다. 차마 잊지 못해 마음에 묻어두면 사랑이다. 언젠가 한 번은 또 볼 수 있길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화려했고, 그때가 화려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오직 그 사람 때문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칼럼의 서두와 그 부연으로 다시 돌아 가보자.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후회는 없다. 초등학교 시절에나 그랬지, 그 이후론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고백을 했다. 망설임과 뜸 들임은 있었지만 결국은 고백을 뱉어냈다. 김건모의 <미안해요> 노래 가사처럼 옷 한 벌, 꽃 한 다발 제대로 사주지 못했던 시절에도 그렇게 사랑을 꾸역꾸역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인생의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선 사랑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사랑이 사랑답고, 사람이 사람답고, 청춘이 청춘답던 시절이었다. 돌아보니 좋은 시절이었다. 사랑하기 좋은 시절을 타고났다.
얘기가 곁길로 빠졌다. 그래, 다시 돌아가자.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동사가 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앞선 <베티 블루 37.2>의 글에서 말했듯, 법과 규칙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차마 동사로 만들 수 없었고 불가항력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징후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앞 문단의 마음이 사는 내내 든다면, 그때 그것은 사랑이었다. 루나가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이었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길구봉구의 노래 가사를 빌려와 좀 더 길게 말하면, 버릇처럼 너를 다시 부를 만큼 그 사람이 매일 그립고, 늘 같은 자리 그 사람이 있던 곳에서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 그건 사랑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아프고, 그때 왜 그렇게 미련했고 어리석었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너를 습관처럼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 그건 사랑이었다.
짧은 에필로그....
사랑에 관한 모든 동사를 이야기한 뒤 마음속에 인두 자국처럼 명징하게 남은 사랑이라는 명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사랑 이야기를 이쯤에서 마무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