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시 보진 않았다. 다시 보려 했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감당할 수 있는 나이였다.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영화가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살면서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랑이었고, 사람이었고, 사건이었고, 결말이었지만 감당할 수 있었다. 그때는 생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사람에게도, 사랑에게도, 그리고 사람과 사랑과 인생의 결말에 대해서도 열려 있었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든 인생과 사랑은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 끝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는 거칠게 나누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닷가 시절, 파리 시절의 에피소드, 광기에 빠져들어 결국 파멸에 다다르는 날들. 이에 따라 연인은 사랑의 시작에서 서로의 발견으로, 서로의 발견에서 서로에게 뭔가 되어주려 하는 시기로,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좌절되어 다시 둘만 남게 되지만 결국 세상으로부터의 거절을 수용할 수 없어 광기로 치닫는 시기로 나아간다.
사랑의 가능성과 좌절
사랑엔 법도 규칙도 없다. 사랑을 시작하는 법도, 하는 법도, 끝내는 법도, 그런 교과서도 없다. 모든 사랑엔 바다 같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은 현실에 있다. 동화나 소설, 꿈이나 영화 속에 있는 것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일상 속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을 하고, 끝낸다. 사랑과 연인의 고통은 여기서 싹이 튼다.
넓은 해변의 방갈로에 사는 주인공에게 그곳은 생계의 해변이자 주거의 방갈로다. 그 방갈로엔 피서지의 여유도, 바캉스의 한가로움도 없다. 바캉스 기간 도시가 빌 때 방갈로들은 매진되듯이, 휴가철마다 부산의 일상은 더 바빠지듯, 방갈로가 집인 사람은 방갈로에 살며 해변을 터전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그녀가 왔을 때 방갈로는 비로소 본연의 의미를 찾았다. 사랑이 일상으로 찾아올 때 내 일상에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다. 당신과 난 원래 방갈로였다. 인생은 원래 해변의 방갈로 같은 것이다. 낮에는 해수욕을 하고 밤에는 취해 섹스를 하며 햇살과 밤의 쾌락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방갈로에 번호가 붙듯, 대양으로 뻗어나간 해수욕장도 폐장 시간이 있듯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존재들은 법과 규칙에 얽매여 살아간다. 사랑 또한 예외는 아니다.
법과 규칙은 냉정하다.
그녀는 아니라고 한다. 사랑은 법과 규칙에서 예외적인 존재라고 한다. 심지어 인생도 그렇다고 한다. 세상은 아니라고 한다. 사회의 법, 돈의 규칙을 들이댄다. 방갈로를 칠하라고 명하고 돈을 벌고 싶으면 일하라고 한다. 하나를 칠할 때, 그것은 예술이 되지만 몇 백 개를 칠하는 건, 생계를 위해 칠하는 건 당연히 노동이다.
노동의 규칙은 그녀와 사랑의 규칙이 아니다. 그녀는 명령을 거부하고 저항한다. 남자는 그녀에게 규칙을 설명하고 법을 지켜달라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는 방갈로 안에 가득 찬 세상 것을 갖다 버린다. 사랑과 축제로 가득 차야만 하는 인생을 가득 메운 법과 규칙의 것들을 갖다 버린다. 그러다 남자의 소설을 읽고 진정한다.
그녀는 남자의 재능을 발견한다. 위대한 소설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 소설가로 만들어 주리라 다짐한다. 여기서도 그녀는 모른다. 사랑도 그러하듯 예술에도 법과 규칙이 있다. 그 법과 규칙을 만드는 권력이 있다. 그 권력은 그 고유의 틀이 있다. 전통이 있다. 방법이 있다.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 모든 것보다 남자의 재능이 우선한다. 재능이면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방갈로에 불을 지르고 파리로 가서 친구의 호텔에서 일한다. 방갈로에서 호텔로의 전환. 호텔도 방갈로와 같다. 투숙객은 일탈의 공간이지만 사는 이에겐 집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출판이라는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타자를 배우고 남자와 아르바이트를 한다.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동시에 작가의 아내도 꿈꾼다. 그러나 번번이 좌절된다. 스물일곱 번이나 투고를 거절당한 경찰처럼 말이다.
반복된 좌절은 광기를 부른다.
작가로 만들어주겠다는 꿈은 문학과 출판의 세계가 만든 규칙과 그 세계의 권위에 막힌다. 결국 그녀는 실현 가능해 보이는 걸 하기로 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몸으로 줄 수 있는 다른 주체의 선물. 아이를 임신하여 그에게 아빠라는 주체를 선물하고자 한다. 작가라는 주체는 문학과 출판이라는 세계의 규칙에 막혔지만 아빠라는 주체는 그녀의 자궁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녀는 상상 임신을 한다. 임신이라 믿었지만 임신이 아니었기에 좌절한다. 피임기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왜 임신을 먼저 꿈꿨을까? 그걸 왜 믿었을까? 환상과 욕망은 법을 초월한다.
초월이 막힌 막다른 길에서 좌절이 시작된다. 좌절의 빈 터에 광기가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싶었고 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세상의 법과 규칙에 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나 자신을 번제물로 드려 희생하면 사랑하는 이의 염원이 이뤄질 줄 알았다. 간절히 바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 사랑하는 이가 행복해질 줄 알았다. 세계의 법과 규칙을 초월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졌다. 패배했고 실패했다. 자신을 마주하기가 싫다. 포기한 뒤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대신 그녀는 좌절을 택한다. 벽을 뚫고자 했던 욕망은 광기가 된다.
남자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녀의 광기를 잠재우고 싶었다. 그녀에게 일상성과 정상성을 찾아주고 싶었다. 남자도 그게 뭔지 몰랐고,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남자가 겨우 생각해낸 것이 돈이다. 남자가 여장을 하고 은행을 턴 이유다. 돈 또한 그 나름의 법과 규칙이 있다. 일을 하거나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남자는 위법을 저지른다. 일탈을 한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돼서 그러한다. 남자는 자신을 불사를 용기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의 광기는 가면을 통해 발현된다.
여자는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쓸모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법과 규칙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인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여자라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광기는 더 깊어진다. 눈을 파낸다. 방호복을 입게 되고 약을 강제로 투약받고 정신 병원에 감금된다. 광기는 치유되지 못하면 격리된다. 내가 그에게 쓸모없다면 차라리 감금되리라. 나에 모든 주체를 차라리 유폐시키리라. 내 눈과 팔과 다리, 내 생명과 내 자유의지조차 소멸시켜버리리라. 감금은, 어쩌면 그녀가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갇힌 그녀를 견딜 수 없다. 세상이 규정하는 정상의 세계로 올 수 없는, 그 가망 없이 알 수 없는 약과 정신병원이라는 감옥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두 번째 여장이다. 난 너를 죽일 수 없다. 대신 킬러를 보낸다. 그렇게 남자는 또 한 번 비겁하게 일탈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죽어버린 그녀를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죽인다. 차마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베개로 그녀의 얼굴을 덮어 죽인다. 그 뒤, 남자는 소설을 계약하자는 전화를 받는다. 글을 쓰며 영화는 끝난다.
현실과 광기 사이에서
영화는 우리가 사랑에 미쳐 있을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각화한 것이다. 광기와 이성, 비정상과 정상, 일상과 일탈, 충동과 통제 사이를 오가는,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가 겪는 내면의 모든 찰나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 광기와 정상의 간극을 오간다. 사랑이라는 바다 앞에서 방갈로라는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문학처럼 숭고한 사랑을 하면서도 비루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과학적인 피임도 한다. 밤새도록 섹스를 하고 싶지만 오늘이 화요일 저녁이라면 내일 출근을 걱정해야 한다. 비루하지만 그게 사는 것이다. 남들처럼. 지치지 않고 미치지 않고.
사랑의 공간에선 밤낮없이 섹스를 할 수 있어도 그 공간 밖에는 방갈로와 호텔처럼 고유의 번호가 붙어 있다. 나는 연인에게 애칭과 별칭, 심지어 내가 경험했듯이 개새끼로도 불리 울 수 있지만 세상은 내 이름을 부른다.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호칭들을 부른다.
우리의 분열과 혼란은 결국 사랑을 일상으로 길들일 때까지 이어진다. 길들여진 사랑은 일상이 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여전히 분열과 혼란 속에 묶어 두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그 사랑을 벗어나려 한다. 세상의 모든 뜨거운 사랑이 결국엔 훈풍 같은 일상적 사랑이 되어야만 하고,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모든 사랑은 저 분열과 혼란 속에서 광기가 된다.
미치지 않고 살기 위해
우리가 미치지 않고 사는 것은 사랑과 같은 마음의 욕망/충동과 세상의 법/규칙, 그 양자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맨 정신으로 살다가 가끔 광기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축제, 섹스, 공포 영화, 블록버스터, 피서지에서의 불장난들은, 결국 유사 광기, 광기의 시뮬라크르다.
우리는 이 유사 광기를 시뮬라시옹 하기 위해 페이스 메이크업을 하고, 문신을 닮은 헤나 타투를 하고, 평소라면 입을 엄두도 못 내는 섹시한 옷을 입고, 평소라면 듣지도 않을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며 광기를 재현한다. 미치지 않고 미친 척, 연기를 한다. 여자가 아닌데 여자로 변신하고 은행을 털고 연인을 죽인 남자처럼.
그 광기의 시간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날 미치게 했던 모든 것을 어제의 시간 속에 묻고 고양이와 술과 책상과 원고지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계약하지 않으면 한 줄의 글도 세상에 나올 수 없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사랑의 약자
결국, 사랑을 믿는 자가, 사랑의 약자다. 법과 규칙을 들이대면서 이대로 살자는 사람 앞에서 사랑이 시키는 대로 자기 자신을 그 사랑에 내몰아 던지는 사람은, 사랑의 약자다. 내일도 없고 일상도 없고 화요일 뒤에 수요일도 없다. 오직 사랑하는 오늘만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 죽고, 내일 다시 살아난다면 내일 또 사랑하다 죽는다. 사랑이 날 미치게 한다면 기꺼이 미쳐 죽는다. 더 이상 죽을 수 없을 때까지 죽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때까지 주고, 그래도 줄 것이 없으면 그땐...
돌아봤다. 미친 사랑을 추억했다. 사랑에 미쳐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던 에픽 하이의 노래가 나오기 한참 전의 일이다. 미쳤지만 끝났고, 끝난 후에도 미치지 않아 멀쩡하게 지금까지 살고 있다. 연인과 사랑엔 순서도, 일반 명사도 붙일 수 없다. 모든 사랑과 연인은 고유하다. 생의 어느 순간에 왔던 그 사랑들은 예약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호텔이나 방갈로처럼 정해진 순서, 정해진 장소에, 와야 해서 온 것이 아니다.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다. 인생의 순탄한 흐름의 옆을 치고 들어와 그 물살을 뒤집어 놓았다가 갔다. 가던 길 가라고, 미치지 않고 살라고, 그러나 다른 사랑이 오면 그때 또 휘청거리며 미치라고, 그러면서 갔다. 그 사랑에게 나도 그런 사랑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미친 사랑, 더 사고 같은 존재는 나였을지도.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랑을 끝내고 멀쩡하게 살고 있어서, 아니면 나도 미친 사랑을 해 본 적이 있어서. 이 상반된 이유로, 중년의 그녀들은 안도하며 일상을 살고 있을지도.